인 앤 아웃(In-N-Out)은 미국 서부에서 주로 영업하고 있는 패스트푸드 체인점이다. 다른 패스트푸드 점과 마찬가지로 신속하게 음식이 준비되고 가격도 저렴한 축이지만, 그 특유의 맛이 있어서 여느 패스트푸드와는 다른 "대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아이들이 좋아해서 우리 가족이 서부 지역을 여행할 때면 이 가게를 거의 빠지지 않고 들를 정도로 필수 방문 장소가 되기도 했다. 이 인 앤 아웃이 이곳 콜로라도, 특히 덴버와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올 것이라는 소식이 수년 전부터 있었고, 작년(혹은 재작년)부터는 그 내용이 매우 구체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년 말에는 콜로라도의 첫 영업점으로 내가 살고 있는 오로라(Aurora) 시의 한 쇼핑몰로 정해졌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아... 생각해 보니 그때만 해도 이 놈의 바이러스가 이곳 미국에서는 다른 나라 얘기처럼 여겨질 때였다.) 애초의 계획은 올 여름에 개업하는 것이었다고 하던데, 물론 코로나바이러스는 이 영업점 개업이 지연되는데도 큰 역할을 했나 보다. 그래도 천천히 공사는 진행되었는지 몇 주전에 소셜미디어를 통해 드디어 인 앤 아웃이 영업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11월 20일에 공식적으로 장사를 시작한 것인데, 아이들은 좋아서 어찌할 줄을 몰라했다. 특히 혜빈이는 소리를 지르고 웃음을 감추지를 못하면서 언제 가냐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햄버거의 하나로 여겨질 수도 있는 이 가게가 개업하기를 손꼽아 기다린 것은 혜빈이 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영업 개시하는 날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일 듯 싶어 아침부터 뉴스 사이트와 소셜 미디어 등의 소식을 찾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갑작스레 몰린 사람들과 차량으로 인해 그 가게의 일대가 마비가 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오로라 경찰국에서는 트위터를 통해 인 앤 아웃 방문을 자제해 줄 것을 트위터를 통해 알리고 있을 정도였다.
혹시나 식사 시간을 피해 가면 좀 낫지 않을까 싶어 혜빈이를 데리고 오후 4시 정도에 가 보았더니 이때까지도 일대의 교통이 마비 상태였다. 오로라 경찰국의 경찰관들과 인 앤 아웃에서 고용한 것으로 보이는 젊은 직원들이 가게의 사방에서 차량을 안내하고 있었지만 가게 주위에서는 넘쳐나는 차량으로 모두가 거북이 걸음이었다. 서행하던 중에 만난 직원에게 얼마나 기다려야 하냐고 물었더니, 내가 기다리던 그 장소에서부터 다섯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아무리 인 앤 아웃이라고 하더라도 버거 하나를 먹는데 그 시간을 들일 수는 없어 낙담한 혜빈이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 밤에 두번째 시도를 했다. 일요일인 데다가 밤 9시가 넘었을 때였으니 이 맘 때면 그래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으로 아내와 혜빈이를 데리고 갔다. 그렇지만 이때도 가게 앞의 주차장에는 많은 차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처럼 주차장의 직원에게 물어보니 세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할 것이고 한다. 그럼 그렇지. 많은 사람들은 나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두 번째 방문이기도 하고 혜빈이가 워낙 기대하고 있어서 나는 웬만하면 기다릴까 했지만, 허리가 좋지 않아 오래 차에 앉아 있을 수 없다는 아내의 말에 다시 돌아왔다. 이때 혜빈이의 표정은 마치 나라를 잃은 듯했으니, 그 심정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지난 월요일 밤에 세번째 시도를 했다. 늦은 밤 11시 정도에 가면 아무리 그래도 사정이 나을 것 아닌가 하는 마음에 충동적으로 아내에게 제의했더니, 그렇다면 자기도 기다려서 밤 햄버거(night burgers)를 먹어 보겠다고 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고 10분 정도 운전해서 도착해 봤더니, 이런... 이전보다는 사정이 낫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차장에 많은 차들이 그 햄버거를 먹어 보겠다고 기다리고 있었다. 주차장의 안내 직원은 약 두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데, 더 이상 혜빈이에게 절망감을 안겨줄 수 없어 기다리기로 했다. 혜빈이는 이전처럼 오래 기다릴 것을 예상해서 휴대폰의 배터리도 완전하게 충전해 온 상태였다.
혜빈이와 차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 두런두런 나누다 보니 그래도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고, 다행 1시간 반 정도를 기다려서 햄버거를 주문해 올 수 있었다. 차량이 하나둘씩 빠지면서 우리의 차가 주문하는 드라이브쓰루(Drive-thru)에 가까울수록 혜빈이는 그 흥분을 감추지 못하니 아직도 애는 애다.
하지만...
종이봉투에 담긴 버거와 프라이즈(fries), 쉐이크를 받아 집으로 향하면서 봉지에서 꺼낸 프라이즈는 차디찼다. 혜빈이는 그래도 좋다고 신나게 먹고 있고 그 흥에 찬물 끼얹을 수 없어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 가족들이 모두 함께 꺼낸 햄버거 조차도 온기가 없었다. 가게에서 집에까지 운전 시간이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것을 고려하면 원래 따뜻했던 것이 이 정도로 차가워졌을 수는 없었는데 아무래도 몇 시간 전에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을 순서대로 그저 봉지에 담에 팔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먹어 보겠노라고 자다가 깨서 졸린 상태에서도 버거를 씹고 있는 유빈이와 아직도 흥분 상태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는 혜빈이의 흥을 깰 수 없어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좀 무성의한 영업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그 시간 동안 수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에 대한 예의가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나 싶어 약간 화가 날 정도였다. 밤늦게까지 기다리느라 시장한 탓도 있고 해서 그래도 다 먹기는 했지만 많이 아쉬운 경험이었다.
여름을 지나면서 어느 정도 진정되는 것처럼 보이던 코로나바이러스는 가을을 거치면서 그 전파력이 급격히 빨라지더니, 이제는 이 바이러스의 공포가 현실화 되던 지난 3월보다 훨씬 악화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미국의 가장 큰 명절인 추수감사절에 여행을 자제하라는 정부의 권고가 있었지만 전국에서 수백만 명이 비행기와 차량으로 각지의 가족들을 만난 후 돌아갔다는 뉴스가 있었다. 12월 5일 오늘 현재로 약 28만 명 정도가 이 바이러스로 사망했고 확진자는 1,440여만 명에 이른다고 하니 심각하기 이를 데 없다. 낙후된 의료 서비스는 물론 정부에 대한 불신, 개인주의적 활동 등의 나쁜 요인들의 모두 작용해서 야기된 사회적, 보건적 문제임은 말할 것도 없겠다.
유빈이는 지난 8월에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된 이후로 계속 온라인으로만 수업이 진행되어 왔고, 일주일에 두번씩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번갈아 하던 혜빈이 학교는 최근 악화된 상황에 따라 온라인으로 모두 전환되었다. 아주 긍정적인 결과를 보인 백신이 전례 없는 속도로 개발되어 정부가 정한 우선순위에 따라 접종을 시작한다고 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백신을 접종할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바이러스가 창궐하여 기존에 수십년 동안 살아오던 생활 패턴을 바꾼 지 9개월 가까이 되었지만 여전히 앞날에 대한 불확실 속에서 살고 있고, 이렇게 갑작스레 바뀐 삶의 방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주고 있다. 아이들과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최악의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경제는 과연 어떻게 되살아 날 수 있을지 암담해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오늘 받아본 잡지 타임(Time)의 표지에는 2020이라는 숫자에 붉은 색으로 X표를 한 후 밑에 "최악의 해(The Worst Year Ever)"라는 부제를 달았다. 물론 2020년이 최악의 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며, 나도 도대체 올해를 정리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 정도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학교도 이 전례없는 사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등록 학생수가 계속 감소하는 것은 물론 주정부의 지원이 급감하는 등 여러 도전을 맞고 있다. 다음 학기의 등록 학생수는 이번 가을 학기보다 더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하니 당분간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 가르치고 있는 수업들은 집에서 온라인으로만 진행하고 있으며 벌써 다음 주가 기말고사 기간이다. 그 다음 주부터는 겨울방학인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정해진 날짜가 되면 월급이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시기이다.
이렇게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호황을 누리고 있는 분야들이 있다고 한다. 온라인 주문의 급증으로 인한 배달업종과 온라인 물품 배달을 위한 창고 정리 등의 분야는 인력 부족을 호소할 정도라고 한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와 관련된 제품이나 서비스도 호황이라고 하고, 가정을 보수하고 꾸미는 일과 관련된 산업도 그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이전에 보이지 않던 부족한 부분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고, 출퇴근을 하지 않으면서 절약되는 시간들을 집안일을 하는 것으로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나와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다. 가족 모두가 식재품이나 다른 필수품을 구입하기 위한 쇼핑, 그리고 가까운 공원으로의 산책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주일의 모든 시간을 집에서 보내고 있다. 특히 아내는 이전에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것들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기 시작했는데, 물론 대부분은 나의 손을 거쳐야 해결되는 일들이다. 그래서 지난 수주일 동안, 집안의 여러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마쳤다.
오랫동안 숙원으로만 남아 있던 주방 캐비넷 페인트 칠은 그야말로 대공사였다. 이 프로젝트가 수반하고 있는 복잡한 과정과 힘든 여정에 대한 깊은 연구 없이 성급히 시작했기에 일주일이 넘게 진행된 이 작업 중간중간에 정말 여러 번의 험난한 고비를 넘겨야만 했다. 이 작업 와중에 겪은 절망(?)과 수난과 혼돈은 아마 이 일을 경험해 본 초보자만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 아내가 옆에서 많이 도왔기에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수준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지만, 정말 집안일을 섣불리 시작하면 안 되겠다는 큰 교훈을 얻기도 했다. 처음에는 주방에만 손을 댔다가, 그 기술이 잊히기 전에 나머지를 처리해야 한다 싶어 위층의 화장실 캐비닛도 칠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좋아하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해야 하니라...
이에 비하면 뒷뜰의 펜스 칠하는 것은 소꿉놀이였다.
이 집으로 이사 온 이후로 제대로 된 관리를 하지 않았던 펜스도 분명 작업 대상이기는 했지만, 과연 조금의 투자라도 할 가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오래되었고 상태도 좋지 않았다. 아마 이 집이 처음 지어진 1990년 후반 이후로 한 번도 페인트나 다른 관리를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될 정도의 상태였다. 그래도 주방이나 거실의 큰 유리창을 통해 항상 보이는 곳이라 어느 정도는 투자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아내의 주문(혹은 압력)에 따라 펜스의 오래된 찌꺼기를 물청소한 후, 이전 주방 페인트 작업 때문에 구입해 놓은 스프레이를 이용해 페인트를 뿌렸다. 세밀한 사전작업과 꼼꼼한 페인트 칠을 요구하는 주방에 비하면 거의 장난이다 싶을 정도로 쉽고 빠르게 끝낼 수 있었는데, 작업 후의 결과물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큰 바람이나 다른 자연재해가 없으면 5년 이상은 충분히 더 견딜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혜빈이와 산책하면서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지금 겪고 있는 이 상황은 마치 우리의 부모님이나 조부님 세대들이 겪었던 전쟁 혹은 경제 대공황과 견줄 수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자 비극일 수 있겠다. 나의 부모세대가 6 25 전쟁이나 보릿고개 시대를 어떻게 살아 오셨는지 궁금했었는데, 나의 손자 세대들은 지금 우리가 함께 겪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할지 모른다. 지금의 이 전 세계적인 바이러스 창궐을 지구 온난화와 자연훼손 등에서 원인을 찾고 있는 전문가들도 있던데 그렇다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유사한 바이러스들이 우리를 괴롭힐 것이라는 그들의 예견이 설득력이 있기도 하다.
우리가 모두 같이 살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불편하더라도 거리두기를 생활화 하고 마스크 착용을 필수적으로 해야 하듯이, 앞으로 이 같은 바이러스 발생을 예방하거나 적어도 그 빈도를 낮추기 위해서는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이기적인 산업/생활환경을 천천히라도 바꿔야 하지 않나 싶다.
5년 전에 TED에 출연해서 바이러스의 창궐에 대해 예견했던 빌 게이츠의 프리젠테이션 비디오를 최근 다시 시청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한 그의 예견과 혜안에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과연 지금의 이 사태를 통해 배운 교훈을 우리가 몸소 실행할 수 있을 준비가 되었을까에 생각해 보니 다시 아찔해지기도 한 순간이었다. 다음 세대를 위해 환경을 생각하고 교육을 생각해야 한다는 등의 구호가 이제는 더 이상 추상적으로만 다가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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