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현 사는 법

재택근무의 자세

남궁Namgung 2015. 12. 30. 04:12


언젠가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 (혹은 재택근무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조언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국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회사에 고용되었다고 하더라도 집에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있다. 어쨌든, 재미삼아 읽어 봤는데, 여러가지 조언 중의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을 "집에서 일한다고 하더라도 잠옷이나 편한 옷으로 입지 말고, 회사에 출근할 때 처럼 차려 입고 일하라" 라는 것이었다.


재택근무 중의 장점 중의 하나가 옷이나 외모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저게 무슨 말인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아주 정확한 조언이다. 내가 나의 일만 처리하면 되니 나의 차림새는 상관 없다는 말은 (조금 과장하자면) 힙합 바지를 입혀서 전장에 내 보내면서 적군을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말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최소한 지금까지의 나의 경우는 그렇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동안에는 아무래도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방학 중에는 집 근처의 도서관에도 종종 가고, 학교로도 자주 "출근"하지만 평소보다는 정신줄이 좀 느슨해 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집에서 5분 밖에 되지 않는 도서관에 나가는 것도 귀찮아질 때가 많은데, 그런 때는 대개 집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게 집에 있을 때면 잠옷이나 편한 츄리닝 옷으로 있게 되고 오후까지 세수도 않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럴 때의 나의 정신상태는 나의 외모와 거의 정비례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내가 파자마를 입고 눈꼽이나 뗀 상태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면 내가 하는 일도 거의 그 수준의 것 밖에 처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개는 쓸데없는 뉴스 사이트를 돌아 보거나 유튜브에서 이런 저런 도움되지 않는 영상들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적지 않다. 


그래서 몇주전 시작된 겨울방학 중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잠을 좀 깨고 씻은 후에 바로 옷을 갈아 입는 것으로 시작한다. 물론, 학교로 출근할 때처럼 약간 정장 스타일의 옷을 입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청바지에 바로 외출이 가능할 정도의 셔츠로 입고 책상에 앉는다. 이렇게 "전쟁을 치르는 복장"을 입을 때와 그렇지 않고 여전히 잠옷을 입고 있는 때에는 나의 잠재적 의식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준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 요즘의 나에게는 이런 제대로 된 옷차림과 외모가 꽤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다음 달 19일 (2016년 1월 19일)이면 봄 학기가 다시 시작된다. 그래서 요즘은 강의안을 다시 업데이트 하는 일에 주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다. 특히 강의 계획서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다. 다른 강사와 교수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강의 계획서 (일명 실러버스 syllabus)를 짜는데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을 쏟는데, 이 계획서는 건물을 만드는데 있어서 설계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주로 나는 새 학기 첫 시간에 학생들과 이 계획서를 같이 살피면서 한 학기를 보여주는데, 한번 공개하면 학기 중에 수정하거나 변경하기가 아주 부담스럽다. 대학원생일 때는 학기 중에 강의 계획서를 몇차례 변경하는 교수님이 있었는데, 몇몇 학생들은 그때마다 무척 짜증내면서 혼란스러워 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물론 교수님 면전에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교수님이 계획서를 바꿀때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기에 나 개인적으로는 그런 계획서 수정에 별 불만이 없었지만, 그런 경험 이후로 계획서를 짤 때는 아주 신중하게 해야 하겠다고 느꼈었다. 


특히,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꽤 많은 우리 학교 같은 경우에는 중요한 일정 (예컨대, 중간고사 날짜나 페이퍼 제출 마감일 등)은 학생들의 스케쥴 조정과도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다른 사소한 일정은 조금씩 바꾼 적이 있어도 꽤 중요한 것은 바꾸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길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몇 학기 가르치면서 느낀 것은 학생들이 배우고 공부하도록 유도해야지 막연히 기대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경찰이나 범죄학 분야에서 아주 중요한 논문이나 책이 있다면 학생들에게 그저 "아주 저명한 글이니 다음 시간까지 읽어 오라"고 해서는 큰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학교 학생들이 게으르거나 공부하고 싶어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어느 학교의 어느 학생이던지 자발적으로 직접 나서서 공부할 것만 기대하고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학생들이 중요한 책이나 글, 영상들을 읽을 수 있도록 교수나 강사가 유도해야 하는데, 내가 지금까지 시도해 본 바로는 과제를 주면서 평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예를 들어, 경찰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논문이라면서 "깨진 창문 이론 (Broken Windows)"이라는 것이 있다. 이곳 경찰관이라면, 그리고 경찰 분야에 관심이 있는 학자나 연구원이라면 누구나 한번 읽어 봤거나 들어 봤을 논문이다. 이런 논문을 학생들에게 그저 다음 시간에 토론할 것이니 읽어 오라고 하면, 아마 절반 이하의 학생들이 수업 전에 그 글을 읽고 올 것이다. 하지만, 짧은 퀴즈나 시험이 있을 것이니 읽어 오라고 하면 "의식 있는(?)" 학생이라면 거의 이 글을 대충이라도 들춰 보고 학교에 오게  된다. 물론 학생들에게 지나치게 부담이 되지 않는 선에서 이런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내가 계획서를 다시 고치면서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이 같이 동기부여를 하면서도 수업이 지나치게 어렵지 않도록 하게 균형을 잡는 것이다. 이제 다섯 학기를 마쳤기에 많은 것을 시도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매 학기마다 새로 시도한 것 중에 효과가 있었던 것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학기 시작 전에 예상했던 것 보다 그다지 효과나 호응이 많지 않았던 것은 다른 방법으로 대체하거나 보완하려고 하고 있다. 


<나는 과목마다 가급적 매 시간에 살펴 볼 과제를 날짜별로 구체화 시켜서 계획서에 담으려고 한다. 

이는 학생들을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나를 위한 점도 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계획서이지만 다음 봄 학기의 경찰 과목 강의 계획서를 수정하면서 

앞으로 약 4개월 여를 어떤 식으로 운영해야 할지 머리 속에 그릴 수 있다. >

 

<미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강의 관리 시스템인 블랙보드 화면이다. 학생들은 강의 첫날인 1월 19일 부터 접속할 수 있지만 그 전에 거의 완성본에 가까운 디자인을 보일 수 있도록 하려고 하고 있다. 물론 내용은 학기 내내 업데이트가 되지만 주된 디자인 (일명 와꾸)은 학생들이 한번 적응하게 되면 다시 수정하기가 어렵기에 처음 설계가 무척 중요하다. >



   

요즘은 지난 학기의 계획서와 강의 자료를 계속 수정 보완하고 블랙보드라는 강의 관리 시스템도 다시 설계해 나가고 있다. 아직 개학까지는 3주 정도 남아 있지만 천천히 새로운 아이디어와 자료들을 꼼꼼하게 체크하려고 하고 있다. 경찰 과목의 경우에는, 계속 경찰의 총기 사용이나 무력 사용, 드론이나 바디 카메라 같이 과학기술의 적용에 대한 새로운 논란과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뉴스를 검색하고 주된 이슈를 찾아서 다음 학기에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다. 조사방법론 (Research Methods) 과목의 경우에도 이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그룹 과제를 실제 설문 데이터를 이용해서 실습하는 방식으로 진행해 보려고 하는데, 학생들이 이 시도에 제대로 따라와 줄 수 있을지 계속 고민 중이다. 


같은 과목을 같은 학기에 같은 방법으로 가르쳐도 학생들마다 그 반응이 같지 않다는 것은 항상 느끼는 바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해도 아주 재밌다고 껄껄 웃는 학생 (혹은 반)이 있기도 하지만, 그 똑같은 농담에 아주 냉랭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경험했다. 하지만, 내가 학생일 때도 계속 경험했고 절감해 왔듯이, 한 과목의 성패는 교수 (혹은 강사)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듯이, 교수의 과목 운영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내가 요즘 가장 고민하며 염두에 두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2015.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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