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좋은 글

That's not fair!

남궁Namgung 2009. 5. 27. 10:19

 

 

 

생각해 보니 국민학교 고학년 이후로는 아버지와 목욕탕에 한번 가본적이 없구나... 아버지와 손을 잡아 본 기억이 없구나... 아버지와 따뜻하게 서로 대화해 본적도 없는 것 같구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달려간 병원에서 뵌 아버지를 뵈었을때 들었던 생각들이다. 특히나 대학 입학 후로는 특별한 고민이나 인생 상담을 해 본 적도 없는, 참으로 건조한 부자관계였음이 너무 한탄스러웠다. '내가 좀 더 살갑게해 드렸었야하는데, 내가 좀 더 내 마음을 열고 아버지와 대화하는 기회와 시간을 가졌었어야 하는데...'와 같은 때 늦은 후회를 했지만, 만시지탄일 뿐이었다.

 

이번에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다소 추상적이지만 비슷한 후회가 들었다. "분노했었야 하는데... 불의에 타협하지 말아야 했는데... 정의에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가졌어야 하는데..." 역시 때늦은 후회일 뿐이다.

 

얼마 전 비행기 엔진 고장으로 갑작스레 뉴욕 허드슨 강으로 비행기를 착륙시켜 모든 승객들의 생명을 구하고, 미국에서는 영웅으로 추앙 받게된 한 조종사는 이런 얘기를 했다. 사고 직전까지의 비행은 조금씩 조금씩 통장에 적금하듯 돈을 예금한 것과 같고, 사고 당시 그간 모았던 모든 경험과 기술을 한꺼번에 인출해서 사용한 셈이라고...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도 비슷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싶다.

 

우리는 여러가지 정치적 원인을 찾고 있지만 결국, 나를 비롯한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극단적 선택에 조금씩 조금씩 힘을 모은 것과 다름 없다는 생각이다.

 

정치 수준은 우리 국민의 수준을 넘어 설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 수준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면 그것은 우리 국민이 만든 결과이고, 내 스스로를 보여주는 것이지, 일부 정치인들과 사회 고위 인사들만의 '작품'은 아닌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사회의 특권과 부당한 권력에 대해서 맞써 싸우시고, 결국 그런 과정에서 '희생'되었다고 해석한다면, 우리 모두는 그런 특권과 부당한 권력이 사회에서 견고하게 자리잡고 뿌리 내리는데 조금씩 기여를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학교생활에서, 사회생활에서, 직장생활에서 조금이라도 정의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저건 부당한 일이다, 이건 공평하지 않다, 이렇게 하는 것은 정의에 반한다.'

 

실천은 고사하고, 내가 이런 생각을 자주 해 보고, 분노하고, 반대하고, 저항해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본다면 자신이 없다. 오히려, 분노를 알아야 할 나이에 이미 '좋은게 좋은 것 아냐?'라는 불의와 타협하는 생각을 스스로 하거나, 남에게 권했던 적이 많을 듯 싶다.

 

술자리에서 어쩌다 이와 비슷한 얘기가 나오면 가까운 후배와 동료들에게 내가 가끔 했던 얘기가 있다. 영국에서 자주 듣던 fair 라는 말이다. 우리도 종종 페어플레이 (fair play)라는 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주로 스포츠에서나 사용하지 일상 생활에서 '그건 공평하지 않잖아, 그건 불공평해'라는 말을 쓰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아니, 스포츠에서도 페어플레이를 서로 요구하는 경우가 적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영국에서도 그렇고, 여기와서도 'That's not fair!' 혹은 'Fair enough!'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우리사회와 영미 사회에서 fair(공평한)가 얼마나 널리 퍼져있고, 그 단어가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사용되고 있는가는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계장님, 과장님, 국장님, 부장님, 청장님, 사장님, 아무개씨, 누구야! 그건 공평하지 않잖아요, 그건 불공평한 일이예요' 라는 말을 내가 해 본적이 있던가? 아니 실천은 커녕, 그렇다는 생각이라도 해 본적이 있는가?

 

누구 때문이었는지 책임을 전가하기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극단적 선택에 나를 비롯한 상당수 우리가 그에 조금씩 조금씩 기여했음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넘치는 우리 젊은 아이들에게
그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 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고만둬라, 너는 뒤로 빠져라."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의 육백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해본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2002년 대선 연설 중

 

이제 나는 나 뿐 아니라 내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또 다른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다. 내가 과연 유빈이와 혜빈이에게 그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그것은 fair하지 않다고 가르칠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 아내, 그리고 가족과 이웃, 학교와 직장 등 모두가 조금씩 저금하듯 힘을 모으면 대통령이 추구했던 그 특권과 부당한 차별이 없는 세상으로 조금씩 전진할 수 있지 않을까....

 

노 전 대통령의 서거도 That's not fair!라고 외치고 싶다.

'내게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설가 김훈의 서재 중  (0) 2009.08.19
초심 (初心)  (0) 2009.08.02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기네스 맥주의 비밀 5가지  (0) 2009.05.23
[만물상] 장영희가 남긴 말   (0) 2009.05.15
Playing for Change  (0) 2009.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