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루이스(St.Louis) 정착기

명장은 연장 탓 하지 않는다!

남궁Namgung 2010. 9. 7. 07:21

어제, 외출을 하려고 다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차문은 잠겨져 있고 열쇠는 없어졌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설마..." 하고 애들한테 물었더니, 혜빈이가 열쇠를 차 안에 넣고 문을 잠궜다고 한다. 차 열쇠가 하나 밖에 없는데, 차 안을 보니, 혜빈이가 제 엄마 것을 제것처럼 가지고 다니는 그 가방 안에 차 열쇠가 보인다. 갑자가 화가 나서, 혜빈이한테 버럭... 화를 냈지만, 기가 죽은 혜빈이 얼굴을 보는 것 외에는 별다는 성과를 거둘 수 없는 것이다.

 

순간 어떻게 할까 이것 저것 생각을 해 봤다. 보험회사에서 해 줄 수 있는지 물어 보는 방법이 있고, (아내의 "권유"대로) 흔히 봐 왔던 철사 옷걸이를 휘어서 운전석 문 유리틈 사이로 휘 젓는 방법이 생각났다. 뒤의 방법은 혹시 차를 더 고장낼 수도 있어 선뜻 해 보고 싶지 않았고, 보험 회사에 물어 볼 생각으로 보험카드를 보니 자세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다. 혹시나 하고 다시 차로 가 봤더니, 불행중 다행인지 운전석 뒤쪽 창문이 약 5센티미터 정도 열려 있다.

 

위에서 직선으로 그 창문틈 아래를 내려다 보니 잠금장치가 눈에 보이고, 혹시 이 틈으로 뭔가를 집어 넣어 그 잠금장치를 잡아 당길 수 있다면 문을 열수도 있겠다는 환한 한 줄기 희망이 보였다. 그래서 일단 철사로 된 옷걸이를 휘어서 집어 넣었는데... 이런... 힘이 쉽게 전달되지 않고, 끝부분도 미끌어지더니 차 문 안으로 홀랑! 들어가 버린다.

 

다시, 뒷뜰에서 주워 놓았던 나무가지를 가져다가 시도해봤는데, 역시 한두번 미끌미끌 하더니 또 홀랑! 안으로 들어간다. "아, 정령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것인가..." 하고 끝없는 절망에 빠지려는 찰라에...

 

아! 하는 돈오의 순간이 찾아 왔다. 일전에 집에 이미 설치되었던 커튼을 떼어 내면서 버리지 않았던 가는 커튼 봉이 있는데, 혹 그 끝을 휘어서 집어 넣으면 힘을 잘 받아 열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계획대로 창문 안에 넣어 돌려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잠금장치가 "탁"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면서 열린다.

 

아, 정말 대단한 희열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마치 어렸을적 보았던 "맥가이버" 아저씨가 된 듯한 자만심이 생길 정도로 뿌듯했다. 아내나 애들이 보면 나의 이 "스마트함(?)"이 얼마나 대단해 보일까?!$%

 


 

가을이 정말 갑자기 찾아 왔다. 오늘은 레이버 데이 (labor day)로, 여기 공휴일이다. 지난 금요일 오후부터 따지면 꽤 긴 연휴다. 원래 어느 모임에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혜빈이 피부가 완전히 낫지 않아, 혹시 하는 마음으로 그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엊저녁에 아내와 상의해서 오늘은 가을 맞이 대청소를 했다. 집안 구석구석 평소에 잘 하지 않던 곳과 잘 정리하지 않았던 곳들을 구석 구석 청소했다. 버릴 것도 과감히 버리고, 잘 둬야 할 것은 안에 집어 넣는 작업을 계속 했다.

 

정리를 하던 중에 재작년에 유빈이에게 사주었던 어린이용 칠판/화이트보드 부서진 것이 보였다. 아내에게 내가 고쳐서 쓸 수 있게 할 테니 놔두라고 한 것이 꽤 되었는데, 저것도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밖으로 꺼냈다.

 

 

 

 

다리 부분이 약한 모양으로, 같은 쪽의 다리부분 두군데가 약 30센티미터 정도가 부러져 방치되어 있었다. 창고에서 찾은 각목이 있기에 "그것을 다리 뒤부분에 대고 못을 박으면 지탱해서 설 수 있겠지" 하는 것이 나의 원래 계획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항상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 법. 그 빨간색 다리의 재질이 그냥 나무가 아니라, 나무를 갈아서 뭉쳐 만든 나무 (무슨 전문 용어가 있을텐데...)이고, 내가 갖고 있던 긴 못도 나사못 밖에 없어서, 그것을 망치로 박았더니, 짧게 자른 각목이 갈라졌다. 계속 나사못을 박으면 각목이 그냥 갈라질 것 같았고, 그렇다고 힘도 제대로 받을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오래 쓰기도 했으니, 그냥 버려야 하나..." 하면서 쉽게 포기하려는 순간, 그 보드의 다리 부분을 희생하고, 그냥 짧은 칠판/화이트보드로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또 다시 퍼뜩 들었다. 그래서 남은 다리 부분을 짧게 잘라 양쪽에 고정되게 연결했다.

 

그 결과...

 

 

 

 

지저분하게 마커와 크레용으로 칠한 부분을 물티슈로 닦아 주는 서비스까지 해서 이전 보다는 훨씬 키가 작아졌지만, 그래도 애들이 앉아서 놀자면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보드로 다시 탄생하게 되었다.

 

 

 

아파트가 아닌 주택에 살면서 갖게 되는 여러 불편함이 있다. 큰 고장이나 문제라면 집주인에게 연락하면 되지만, 그렇지 않고 사소한 것들은 직접 해결해야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물론, 저런 자동차 문 여는 것이나, 애들 장난감 고치는 것은 어디에 살던 내가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일게다.)

 

하지만, 그렇게 자력으로 해결해야 하는 여러 것들이 때로는 생각치 않은 기쁨을 주는 경우도 많다. 지금까지 잘 커주고 있는 토마토, 오이, 깻잎 등과 같은 가든일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떨어졌던 세척기 아랫 부분을 짧은 철사를 활용해서 원래 모습대로 제자리를 찾아 주는 것에까지, 내 스스로도 "아, 내가 이런 기술까지 있었나" 하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일들이 종종 있다.

 

예전 한국에서 아파트에 살 때와는 달리, 떨어진 책상 서랍 붙이는 일, 벽에 못 박는 일 등 이전에 생각지도 않게 망치와 못을 잡는 일이 많다. 비싼 인건비 등이 한 요인이기는 하겠지만, 실제 미국 사람들은 전기나, 하수구 고치는 것과 같이 아주 전문적인 일이 아니라면, 웬만한 것들은 스스로 만들고, 고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홈디포 (Home Depot)라는 큰 하드웨어 가게에 가보면 이런 점은 다시 한번 알 수 있다. 작은 나사 못에서부터 주방 마루에 이르기까지 구매자가 직접 사서 공사하는 것들을 파는 것이 아주 많다.

 

내가 하는 일이라야 정말 여기에다 사진 올리는 것도 민망하게 생각해야 할 정도로 아주 작은 것들이고, 부품도 비싼 것들을 사지 않고 이미 집에 있는 이런 저런 것들로 대신 사용하거나, 임시변통 하기도 하지만, "명장은 연장 탓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나의 저 작은 톱질에 명장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기에는 비약도 너무 심한 비약이지만, 제한된 자원을 얼마나 창의적으로 사용하느냐가 기술자를 분별할 수 있는 척도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이런 말은 크고 작은 공사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것이고, 공부나 연구에서부터 요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활 분야에도 들어 맞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이번 공사로 남게 된 저 부품도 버리지 않고 창고에 다시 넣어 두었다. 또 다시 이 맥가이버 머리 속에서 저 연장을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깨달음의 순간이 올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