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금요일, 갑자기 쌀쌀해진 금요일, 혜빈이가 학교를 가지 않는 금요일, 그리고 아내가 없는 마지막 금요일이다. (2017. 3. 24.)
며칠전부터 어제밤부터 오늘까지 눈비가 올 것이고, 기온도 많이 떨어질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다. 한동안 초여름 날씨를 방불케 하는 따스함을 즐기면서 이대로 봄을 지나 초여름으로 이르는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그럼 그렇지... 여긴 덴버다.
어제 밤에는 바람이 세차게 부는 소리가 들리고, 비가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도 제법 요란했다. 기온은 많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예보에 따르면 섭씨로 영상을 조금 넘는 온도라고 해서 밤에 자기 전에 보일러에 온도를 맞춰 놓고 잤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창밖에서 작게 들리는 소리가 있어 커튼을 열었더니 아직도 눈인지 빈지 모르는 것이 내리고 있었다. 이미 이웃 지붕들에는 눈이 적지 않게 쌓여있었다. 침대 옆에 놓고 잔 휴대폰을 열어 보니, 잘 모르는 전화가 와 있었다. 혹시나 하고 메일을 체크해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혜빈이 학교 (전체 교육청 산하의 학교들)는 날씨가 좋지 않아 학교 문닫는 날이라고 연락이 왔다. 밖에는 나가 보지 않았지만, 비가 같이 온 이유로 차가 다니는 길에는 눈이 쌓여있지 않았었다. 저 정도면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당연히 학교 가는 것으로 알고 있을 터인데, 애들만 신나는 날이다. (혜빈이한테 물어 보니 오늘은 학교에 가고 싶었다고 한다. 오늘은 잠옷 차림으로 학교에 가도 되고, 다음주가 방학인 관계로 교실에서도 영화를 본다고 했었단다.)
아무튼, 혜빈이는 해결이 되었고 유빈이네 교육청은 어떤 결정이 있을까... 좀 기대를 해보려다가 유빈이를 깨우고 학교 보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어제 먹은 떡국과 한국 마켓 (H Mart)에서 사온 한국식 소세지를 계란에 묻혀 구워 주웠더니 전과 다르게 잘 먹고 길을 나섰다. 날씨가 좋지 않아 교통체증이 있을 것 같았는데, 다행 전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한산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아마도 금요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으로 데려다 주고 집으로 왔다.
혜빈이는 오늘 스노우데이라서 학교를 안가도 되는지 모르고, 벌써 아침을 먹고 가방까지 다 싸서 아래에 내려와 있었다. 오늘 안가도 된다고 했더니, 내가 농담하는줄로 알고 웃으면서 그럴리가 없다는 표정이다. 내 휴대폰에 와 있는 메일을 확인하고 나서야 실망한 표정이다.
아침에 한가한 시간을 보내다가 혜빈이한테 동네 도서관이나 다녀 오자고 했더니 저도 심심한지 별다른 대꾸 없이 따라 나왔다. 그런데, 이런... 날씨 관계로 평소 9시에 열던 도서관이 10시에 문 연다고 공고가 붙어 있다. 실망한 마음에 둘이 어찌 할까 하다가 근처 가게에 가서 액상 풀이나 사오자는 혜빈이 의견에 따라 타겟 (Target)에 가서 풀을 사고 드대로 집에 왔다. 혜빈이는 요즘 애들이 푹 빠져 있는 슬라임 (slime)만들기로 또 오전을 다 보낼 것이다.
어머니와 장모님은 나와 전화를 할 때마다 애들을 먹여 살리고 있기 힘들겠다고 걱정하시고, 여기서도 어쩌다 만나는 지인들은 잘 먹고 사냐고 묻는 것이 인사가 되었다. 남자 혼자서 어린 애들을 데리고 먹이면서 지내는 것이 만만한 것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먹고 사는 것, 정확히는 때되면 먹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고, 먹고 싶은 것을 말해 놓으면 대부분 뚝딱 해내는 아내와 지내다가 혼자서 매끼니 메뉴를 생각해야 하니 전보다 신경쓰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내 혼자 생각으로는) 애들에게 어느 정도의 맛과 영양을 공급해 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아내가 가기 전부터 이것 저것 준비를 해 놓았고, 집에서 가까운 곳에 한국 마켓이 있으며, 중간 중간에 가깝게 지내는 분들이 집으로 초대도 해 주시고 식당에서 밥도 사주셔서 내가 크게 하는 일이 없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아빠 노릇을 나쁘지 않게 하고 있는 것 아닐까.
어제도 유빈이를 데리러 학교로 가는 길에, 한국 마켓에 가서 이것 저것 반찬을 사 왔다. 냉장고에 얼려져 있던 곰국을 아침부터 녹이고 있었는데 저녁에는 떡국을 끓일 심산이었다. 떡살과 소시지, 총각김치, 깻잎 등도 같이 사왔는데 다른 반찬은 내일 아침에 먹을 것으로 계획했고, 저녁에는 곰국으로 떡국을 끓였다. 유빈이와 혜빈이도 별다른 말 없이 제법 잘 먹는 것보니 배가 고팠거나 제 엄마 솜씨와 비슷했거나다. 아내에게 미리 전화로 물어 봐서 간단히 어떻게 해야 할지 교육 받은 후에 끓였기 때문에 그럭저럭 먹을만 했을 것이다. 한 것이라봐야 녹은 곰국물에 떡살을 넣고, 소금과 조미료(!)를 적당히 넣은 것 뿐인데 내가 먹어도 괜찮아서 은근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요즘에는 배출되는 그릇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하루에 한번, 대개는 저녁에 설거지를 하곤 하는데, 어제도 저녁을 먹자마자 그릇까지 다 씻어 놓으니 하루를 잘 보낸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 해서 아내가 한국을 방문한지 2주가 넘었다. 그리고 올 때까지 3일 남았다.
<완제품을 맛보고 있는 애들. 사진을 찍고 나서 보니 국물부터 맛보는 혜빈이는 폼이 정말 그럴싸하다.
내 것에는 김을 많이 잘라서 넣었더니 맛이 더 구수했다.>
<아내에게 전화해 보니 냉동실에 고기를 잘라서 얼려 놓은 것이 있다고 했다. 그것을 잘라서 국물에 넣으니 맛이 더 좋았다.>
<총각김치는 아직 익지 않았기에 냉장고에 넣지 않고 꺼내 놓았는데, 아마도 아내가 왔을 때라야 먹을 만할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영국에서 유학 생활할 때와 비교하면 정말 먹고 사는 삶의 질이 이렇게 높을 수가 없다.>
'남궁현 사는 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웨스트 팜 비치 (0) | 2017.04.15 |
---|---|
정신 똑바로 차리기 (0) | 2017.04.07 |
Successful Day (0) | 2017.03.23 |
아내 부재중 생존 보고서 Part 2 (0) | 2017.03.22 |
아내 부재중 생존 보고서 (0) | 2017.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