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빈이 사는 법

부모에게 기쁨이 되는 법

남궁Namgung 2017. 1. 28. 05:14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는데, 내가 다니던 부여고등학교 후문에는 좀 고급스러운 고깃집이 있었다. 흔히 도시의 변두리에 위치한, 조용하고 한적하면서 가격도 꽤 나가는 그런 가게였다. 아마도 그 가게 앞뜰에는 시골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운 (작은) 잔디밭이며 조그만 연못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정말 초창기 형태의)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살고 있었고 주중에 잠은 물론 식사도 학교의 기숙사에서 해결했다. 잠자는 숙소는 학교 본관 건물에 위치해 있었지만 식당은 학교 밖 후문 쪽에 위치해서 매 끼니마다 그곳으로 오가야 했다. 식당은 후문으로 나가 곧게 뻗어진 길을 약 200미터 정도 걸어가야 했는데, 이 고급스러운 고깃집은 후문으로 나가면 오른쪽에 위치해 있었다. 


잘은 몰라도 좀 잘사는 사람들이나, 후하게 대접해야 할 일이 있는 경우에 이 집에 와서 사먹지 않나 하는 생각할 뿐이었고, 3년 내내 이 길을 오가며 매끼를 해결하면서도 이 식당에는 갈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아마 고3 때였던 것 같다. 


어느 날 친구들과 이 길을 걸어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길가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셨다. 친구들과 정신없이 얘기하면서 가느라 길 옆에서 서계신 어머니를 알아 보지도 못하다가 먼저 어머니를 발견한 친구들이 가르쳐 줘서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왠일이신가 했더니 저녁 먹으자고 하시면 그 "고급진" 식당으로 나를 데리고 가시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평소 고기를 좋아하는 내게 그 식당에 데리고 가서 고기를 사주시러 일부러 오신 것이었다. 


그 전까지 한번도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지금도 모른다), 저렴한 보통 삼겹살집 보다는 훨씬 비쌀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처음 그 가게로 데리고 갈때 좀놀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번이나 그곳으로 데리고 가셨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처음 나를 데리고 가신 이후 여러번을 그곳에 데리고 가셔서 맛난 고기를 사주시곤 했었다. 우리 저녁 시간이 좀 이른 편이라 이 식당에 가면 나와 어머니가 앉아 있는 테이블 밖에 손님이 없어 아주 한산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맛있게 고기를 먹고 왔었다. 


어머니는 힘들게 고3을 지나고 있을 막내 생각에 시간을 맞춰 버스를 타고 읍내인 부여로 나오셔서 다시 한참을 걸어서 그 학교 후문까지 와서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때만해도 그 일부러 식당에 데리고 가셔서 맛난 음식을 사주시는 어머니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어제는 유빈이 학교에서 가을부터 시작되는 내년 학기 수업과 관련해서 학부모를 불러 설명해 주는 회의가 있었다. (2017. 1. 26.)


아침에 학교에 데려다 줬다가 잠시 도서관에 들러 일 처리를 하고, 집에 들러 점심을 간단히 먹고 아내와 함께 다녀왔다. 약 1시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회의였지만 학교에서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특히 아내가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아무래도 유빈이가 벌써 고등학교를 시작한다는 신기함도 있고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이것저것 잘 생각해서 결정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 날은 학교에서 두명의 선생님들이 내년에 선택해야 할 과목 중의 일부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학생이나 학부모로부터 질문에 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회의가 끝나고 학교 주차장에서 아내와 잠시 얘기하다가 나는 콜로라도 스프링스 (Colorado Springs)로 향했다. 유빈이가 학교를 끝나면 집으로 데리고 가야 했기 때문에 아내가 유빈이를 데리고 가기로 했고, 이 날은 혜빈이네 학교 합창단이 이곳에서 열리는 음악교사 학회에 초청을 받아서 발표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차를 따로 가져갔었다.  


혜빈이네 학교 합창단이 콜로라도 음악교사 협회 학회에 초청을 받았다는 소식을 작년에 들었다. 평소에도 매주 화요일 아침이면 학교를 한시간씩 먼저 가서 연습을 해 왔지만, 특히 이 초청 소식이 있은 후로는 음악 선생님과 더 열심히 연습해 왔었다. 


특히 이번 한달 동안은 일주일에 두세번씩 한시간을 먼저 학교에 나가 연습을 하곤 했다. (음악 선생님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는 않았고 다만 콜로라도 음악교사 연합회 (Colorado Music Educators Association)의 초청이라고만 했는데, 행사장에 가보니 아마도 이 학회에서 공립하교 초등학교 학생들의 합창단 활동에 대해 발표하면서, 그 성과의 일부로 학생들의 합창을 시연한 것이 아닌가 짐작되었다.)


콜라로라 스프링스는 덴버에서 남쪽으로 한시간 정도 떨어진 곳인데, 학회가 열리는 곳은 약간 외곽 쪽으로 더 떨어진 호텔이었다. 혜빈이는 학교에서 다른 합창단 친구들과 먼저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시간이면 이미 학회가 열리는 호텔에 도착해 있었을 시간이었고, 나는 행사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2시가 조금 넘어 출발했다. 


다행 가는 길은 많이 막히지 않았고, 호텔에 도착해 보니 그 동에는 무슨 관광지인양 분위기가 색달라서 좋았다. 혜빈이 학교 합창단은 제 시간에 맞춰서 시작을 했는데, 원래 학회에 참석한 회원들 (거의 대부분이 음악교사일 것이다)도 일부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나처럼 자식들이나 손주들의 발표회가 신기해서 따라온 학부모들이었다. 


큰 홀에 마련된 무대에서 발표를 하는데, 며칠전에 학교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복장, 같은 음악으로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다소 규모도 있고 이름도 있는 행사에서 발표하는 것이 뿌듯하게 생각되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애들이 준비한 노래를 다 마치자 학부모들이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는데, 마음만은 카네기 홀에서 발표하는 음악가의 부모와 별반 다르지도 않을 것이다. 




날이 꽤 쌀쌀했지만 합창단 복장이 얇은 셔츠여서 행사장 안팎으로 이동하면서 꽤 추웠었을텐데 그래도 오는 길에 물어 보니 재밌다고 한다. 부모가 미처 오지 못한 아이들은 왔던 대로 전세 버스로 다시 학교로 돌아갔고, 나처럼 행사장에 직접 온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그 자리에서 데리고 함께 덴버로 돌아왔다. 


오늘 길은 퇴근시간과 맞물려 약간 정체가 있는 구간도 있었고, 한때는 함박눈도 내리는 곳이 있어서 걱정을 했는데 덴버쪽으로 좀 더 북쪽으로 올라 오다 보니 눈도 멎고 정체도 거의 풀렸다. 




예전에는 애들이 무슨 행사가 있을때 학교나 다른 곳으로 다니면서, 이 모두가 애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 부모가 자식들때문에 어딘가를 따라 다니면서 구경도 하고, 정서적으로 응원도 해 주는 것들이 모두 자식을 위한 것만은 아닌 것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내가 유빈이나 혜빈이가 없다면 학교 학부모 회의를 가고, 애들 합창단 발표를 다니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구경을 할 일이 언제 있을까. 


이렇게 행사나 회의에 다니면서 예전에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하셨던 일들도 다시 생각나고, 부모로서만이 느낄 수 있는 경험, 부모만이갖게 되는 만족감도 갖게 된다. 어제 합창단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가만 보고 있노라니 내가 어릴적 무슨 합창단, 풍물놀이패, 무슨 시험 등이 있으면 되도록따라다니시면서 사진도 찍어 주시고 격려, 위로 해주시던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이 떠 올랐다. 


그러면서 이 모든 시간들이 내가 자식을 위해 시간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로 인해 나 어릴 적의 경험을 떠올리거나 색다른 경험을 하면서 또다른 형태의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어머니는 공부하는데 힘내라고 일부러 학교 앞까지 찾아 오셔서 맛난 고기를 사주시곤 하셨는데, 당신은 그때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를 만나러 학교로 오가시는 그 길에서 지금의 나와 같은 생각을 하셨는지도 모른다. 친한 선배가 자식을 키우면서 그 자식들에게 받은 행복으로 효도를 이미 다 받은 것이라고 말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나는 그 얘기가 이제 어느 정도 공감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을 키우는 매 순간이 행복하고, 매 순간에 아이들로부터 만족을 받는 것이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가끔씩 생기는 이런 소소한 이벤트를 통해 부모라는 신분이 어려운 것만은 아니라고 다시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늦게 알게되지만, 자식은 그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부모에게 큰 기쁨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혜빈이 사는 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To be continued...  (0) 2017.05.30
Gloria the Torch Carrier  (0) 2016.05.21
An "Eerily" Difficult Word  (0) 2016.01.14
Holly Jolly Holilday  (0) 2015.12.11
Gloria at the Colorado Rockies  (0) 2015.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