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달 두번째 주 금요일에 학과 회의가 있다. 학과장 주재로 12명의 교수가 모여 학교의 일이나 학과의 행정에 대해 정보를 주고 받고, 과 차원에서 결정해야 할 일들을 의론하고 투표를 하기도 한다. 오늘은 11월 모임이 있었다. (2016. 11. 11.)
매달 한번이래 봐야 한 학기에 세번 정도 모이니 1년에 대여섯번 밖에 모이지 않지만 수업 일정이 달라 얼굴도 잘 보기 어려운 교수들을 한 자리에서 보고, 공적인 얘기나 사적인 얘기들을 나누곤 한다.
오늘은 온라인 수업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를 듣고, 내년 가을학기부터 새로 설강되는 Cybersecurity 전공 과정에 대한 진행 사항도 전달 받았으며, 그외 학과 예산 사용 등에 대해서도 과 위원회에서 결정된 사항을 들었다.
무엇보다 오늘 회의에서는 새로 당선된 이곳 대통령 트럼프와 그 “후유증”에 대한 의견을 진지하게 나눴다. 새로운 대통령이 당선되면 대개는 그 나라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긍정적인 전망이 많아야 할 텐데, 미국의 많은 학교들이 특이한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일부 도시에서는 선거 다음날부터 대통령 당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시위도 벌어지고 있다지만, 민주적으로 치뤄진 선거를 뒤집는 어떤 일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트럼프는 선거기간 내내 “극우주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극단적인 정책과 비전을 내어 놓았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백인 우월주의” 혹은 “자국 이기주의적”인 견해를 취한다면서 트럼프가 아주 위험한 인물이라고 내세웠지만, 결국 그는 미국을 대표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가 되었다.
선거 전날, 아니 선거가 끝나기 전까지만 해도 트럼프의 당선을 점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최소한 (트럼프가 아주 편협하고 불공정하다고 주장한) 많은 방송과 신문 등에서는 그의 당선 확률을 아주 낮게 점쳤다. 하지만 그의 지지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그는 큰 선거인단 차이로 클린턴을 쉽게 물리치고 대통령이 되었다.
나는 정치에 대해 아는 것도 많지 않고 그리 관심이 많지도 않다. 다만 다른 직장 동료나 학생들과 대화를 위해서, 그리고 내 수업자료를 찾거나 개인적인 연구를 위해서 일부러 뉴스를 많이 듣고 읽기 때문에 꽤 오랫동안 미국 대통령 선거 과정을 지켜봤다.
트럼프는 일부 공화당원들도 고개를 내저을 정도로 과격한 제안들을 하면서 공화당 후보 선출 과정에서도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그가 돈 많은 사업가이고, 높은 시청률을 자랑했던 예능프로 진행자였기 때문에 공화당 후보 선출 과정에서도 많은 미디어의 관심을 집중 받았다. 그 같은 인지도와 미디어에의 노출 덕분인지는 알 수 없겠지만 많은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공화당 후보에 당선되었다.
그가 선거기간 동안 내어 놓았던 정책들이나 발언들은 기가 막히거나 말도 안되는 것 같으면서도 많은 미디어에서 크게 다뤄졌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오는 사람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범죄자들이고, 멕시코인들이 미국으로 마약을 계속 유입시킨다는 발언은 그 후에 쏟아진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것 처럼 느껴질 정도로 기존 정치권에서 들어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미국과 멕시코 경계에 “아름다운” 장벽을 설치해서 멕시코 불법 체류자를 줄이겠다는 것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농담처럼 생각하고 콧방귀를 뀐 사람들이 많았지만 불법 체류자에 대한 정부의 대책에 불만을 갖고 있던 사람들의 큰 지지를 받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 계속 쏟아진 그의 행태, 특히 같은 공화당 후보에게도 인신 공격을 하면서 비웃거나 헐뜯는 말과 행동, 클린턴과의 경쟁에서 행해진 많은 “기이한” 행태와 발언들도 그의 지지자들을 더욱 똘똘 뭉치게 할 뿐이었다. 15명이 넘는 후보로 시작했던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 그 쟁쟁한 기성 정치인들을 모두 물리치고 그가 당당히 공화당 후보가 되었을 때까지도 그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의 선거 쟁점 중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가 "대통령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으니 더 할 말이 있을까.
많은 여론조사 사이트에서 각 주의 여론조사 결과를 종합해서 선거결과를 예측할 때도 선거전날 까지도 클린턴의 우승 혹은 압승을 점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트럼프 자신은 많은 방송과 신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여론 조사를 믿을 수 없다면서 여론조사 기관들이 모두 사기를 치는 것 같다(phony)고 말하곤 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그저 트럼프 다운 발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같은 당의 일부 지도부와 당원들의 지지거부, 많은 언론의 클린턴 지지, 클린턴 보다 훨씬 못한 재정 상태 등에도 불구하고 기적과 같이 대통령까지 되었다.
수많은 정치 전문가와 기성 정치인, 기자와 저널리스트 등의 예상을 깨고 도대체 그가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가에 대한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물론 이런 분석은 당분간 계속 될 것이고, 그가 그간 살아 온 과거나, 특히 그가 선거과정에서 보여준 기이하고, 획기적이며, 예상을 뒤집는 발언과 행동, 정책과 비전 등은 두고두고 미국의 정치사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현재로서 우려스러운 것은 그의 극우적인 정책으로 인한 사회적 파장은 계속 될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나처럼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민 온 사람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이 걱정된다. 특히 이곳의 다수민인 백인과 종교적으로 인종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불확실성도 걱정된다.
오바마 대통령은 특정 자격이 되는 경우에 한해 특히 이곳에 불법으로 입국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합법적으로 일을 하거나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행정명령을 내렸었다. 물론 입법적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고 공화당의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논란이 있는 제도이지만, 이 제도 때문에 우리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흔히 합법적인 서류가 없다고 해서 undocumented 학생이라고 하는데, 약간 진보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는 우리 학교에서는 합법적인 신분이 없어도 일정 조건이 충족되면 입학을 허락해왔다.
하지만 이제 이 학생들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태이고, 지금 그들이 혹은 그들의 부모들이 겪고 있는 불안과 걱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트럼프는 선거운동 기간 내내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이곳의 불법 체류자는 모두 자국으로 방출될 것이고, 오직 합법적으로 이민 오는 사람들만 받아 들인다는 점을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수많은 지지자들은 그의 이 같은 정책을 열렬히 환영해 왔는데, 이 문제가 실제 교실에서도 민감하게 다뤄지고 있다.
불법 체류자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애기일 수도 있지만, 지난 수십년 간의 미국 이민 정책을 고려한다면 트럼프의 제안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지, 또는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앞날을 위해서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들도 많다.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법 체류자가 된 어린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정서적인 불안감과 공포심은 이 모든 과정에서 고려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단지 특정 종교 (특히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는 이유로 그 종교를 믿고 있는 전체를 잠재적 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는 일부의 시선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엊그제 학교의 모든 교수들에게 총장과 단과대장이 선거 이후의 학교 분위기 변화에 대한 우려 섞인 메일이 발송되었다. 총장의 메일에는 “우리 학교는 모든 인종과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은 모두 품는 곳”이기 때문에 선거 결과에 크게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 포함되었었는데, 이때만해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어제 단과대장이 대통령 선거 이후에 우리 학교의 교실에서 실제로 발생한 몇몇 사례를 제시하면서 다시 한번 우려의 메일을 보낸 것을 보고는 크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의 어떤 학생들은 걱정이 되어 대중 교통을 이용하지 않는다거나 학교에 오기를 꺼리기도 했다고 하고, 일부 교실에서는 멕시코인 자녀들에게 토론 중 “너는 언제 너희 나라로 돌아가냐?” 라는 식의 발언을 서슴치 않는 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제 “트럼프다운” 발언들이 인종차별주의적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아니라 트럼프 당선 이후 정당성을 획득한 듯이 착각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이제 이 같은 극단적인 사고와 발언들이 어느 곳에서도 일어 날 수 있는 분위기가 된 것 아닌가 싶어 걱정스럽다.
<총기사고나 다른 큰 이슈가 있을 때나 이런 메일이 발송되는데, 트럼프 대통령 당선은 그와 비슷한 "사고"인 것인가?>
어메리칸 드림 (American Dream)이라는 말은 희망의 상징처럼 쓰여지곤 했는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어떻게 특정 종교인과 특정 국가 출신인들을 뭉뚱그려 색칠하는 편협하고 이기적인 인물이 나라의 수장이 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을까?
오바마 대통령의 진보적인 여러 정책에 반감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이민자에게 지나치게 관용한 것처럼 보이는 정책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여러 경제지표는 계속 나아졌지만, 시골에서 혹은 기존의 공업단지에서 직업을 잃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은 경제가 나아졌다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동성연애에 관대하고 동성간 결혼을 지지하는 민주당의 정책들을 혐오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며, 경찰의 총기사용은 무조건 흑인에 대한 지나친 무력사용이라고 주장하는 일부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야 어떻든 이제 미국은 새로운 장으로 진입한다. 나는 미국이 대통령 한 명으로 인해 절망적으로 퇴보하거나 극단적인 좌 혹은 우로 편향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절대적인 역사는 짧지만, 우리나라를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모델로 삼고 있는민주주의는 바로 이 나라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정치 사회적인 시스템이 정착되어 있고,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그 어느 나라보다 다양성을 존중해 주는 나라라고 개인적으로 믿는다. 그렇기에 아직도 이 나라에 와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추는 반드시 그 반대 방향으로 돌아 올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고 하는 것이 지금으로써는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나는 유빈이, 혜빈이와 우리 가족의 이민 상태를 대화한 적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고 있다. 여러 뉴스 채널에서 보도되는 것들을 보자면, 일부 학교들에서는 인종과 출신을 이유로 놀리고 왕따 시키는 일이 일어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유빈이와 혜빈이도 이름이나 생김새 때문에 극우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다른 학생들에게 상처 받는 일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닌 소수인종인 가족들이 대부분 갖고 있는 우려라고 본다.특히나 여러가지 신분상의 문제를 않고 있는 사람들과 그의 자녀들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일 것이다.
트럼트의 선거 모토는 “미국을 다시 완벽하게 (Make America Great Again)”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물었다. 과연 이 주장에서 말하는 미국이란 누구의 미국을 말하는 것인가. 이제 지켜 볼 일이다.
'미국을 말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라의 품격, 국격 (0) | 2010.04.17 |
---|---|
2010 인구 총조사 (Census) (0) | 2010.03.18 |
테뉴어 (Tenure) (0) | 2010.02.24 |
미국적인, 정말 미국적인... (0) | 2009.12.18 |
Black or White (0) | 2009.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