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권 국가 출신이 아닌 히딩크 감독은 항상 영어와 관련된 책을 갖고 다니면서 영어 공부를 한다고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있다. 자기 나라 말이 아닌 영어로 인터뷰를 해야 할 일이 많고, 특히 자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감독을 하게 되면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하니 그렇게 자주 "칼"을 갈아야 했었을 것이라고 이해한다.
내가 감히 히딩크 감독과 비교할 수 있을까마는 아직도 어휘책이나 문법책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나의 모습을 보면 간혹 동질감을 느끼기도 한다. 10대초반에 영어책을 본격적으로 잡았으니 거의 30년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영어가 자연스런 "언어"라고 생각되기 보다는, 인위적이고 작위적으로 작동되는 "기계"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확실히 나는 한국사람이다.
유빈이를 데리고 중고상점을 종종 가곤 한다. 유빈이는 주로 오래된, 하지만 거의 헐값에 가까운 DVD를 고르고, 나는 중고책 섹션에서 책을 둘러보곤 한다.
갈 때마다 유빈이는 DVD를 대여섯개씩 골라서 충동구매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하긴 그래봐야 10불도 채 되지 않는다. 나도 눈에 낯익은 책들을 집거나혹은 책의 뒷장에 써있는 설명을 읽고 흥미롭게 보이는 책들을 골라 온다. 거의 논픽션이지만 어쩌다가 실용적인 책들, 그리고 애들 참고서 같은 것들도 골라 올 때가 있다.
얼마 전에는 이 중고 상점의 책꽂이에서 어휘 책을 봤다. 애들 공부할 책을 고르려다가 발견한 것인데 일단 가격이 무척 저렴했고, 방학이었던지라 무엇이라도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을 때였다. 그래서 이 어휘책들을 골라 왔는데, 손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포켓사이즈의 책은 1불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99센트). 그리고 책도 몇 십년이 되었는지 책 안의 종이색이 벌써 누렇게 변해 있었다. (개인적으로 책의 내용과 상관 없이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 남은 책을 좋아한다.)
"Word Power Made Easy"라는 책인데, 그래도 이 책의 전 소유자가 단 한번도 거들떠 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될 정도로 안은 깨끗했다. 아주 새 책을 손에 든 기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완전히 헌책을 갖고 있는 기분도 아니고, 특히 내가 좋아하는 오래된 책 냄새가 강했다.
몇 주 전부터 이 책으로 틈틈히 단어 공부를 하는데, 아주 실속있고 체계적인 구성과 내용에 마음이 간다. 잠깐 인터넷을 뒤져 보니 초판은 1949년, 그 후로 1978년 판이 있었고, 지금도 판매가 되고 있는 단어 책인 듯 싶다.
이후로 산 책은 "Words that Make a Difference"라는 책이다. 물론 이것도 가격이 저렴했고 안의 내용도 거의 새 것처럼 깨끗했다 (얘들도 어휘 공부를 안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까?).
"Word Power Made Easy"보다는 좋은 종이와 커버로 되어 있지만 내용은 다소 어려운 편이었다. 과연 내가 이런 단어를 사용할 일이 있을까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는 낫다는 부모님 같은 생각으로 천천히 단어들을 보고 있다.
"Word Power Made Easy"가 어근이나 유사한 단어 등 어떤 관련성을 위주로 엮어져 있다면, 이 책은 단순하고 정직하게도 ABC 알파벳 순이다.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는데, 예전 대학원 진학을 위한 GRE 공부가 생각나기도 한다.
아무튼 얼마전 B까지 마쳤는데, C장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아래와 같은 글이 있다. C와 관련된 copious라는 단어를 인용해서 시작하고 있다.
어느 글의 일부를 인용한 것인데, 마치 어렸을 적에 읽은 "메모광"과 비슷한 글이 아닌가 싶다.
인용된 글에서 Mr. Hoving이라는 사람은 매일 같이 일기장과 같은 저널을 쓰고 있고, 이 저널에는 그와 대화했던 사람의 안색까지 인용할 정도로 구체적으로 적고 있기 떄문에 아주 오래 전에 죽은 사람과의 대화도 그대로 살려 낼 수 있다는 이야기 이다.
copious가 많은, 풍부한 등의 뜻을 갖고 있는데, 아주 많은 노트 (copious notes)를 적고 있다면서 그 단어를 쓰고 있다.
그러고 보니 글을 잘쓰고 못쓰고와 관련없이 가급적 자기의 생각이나 경험, 생활을 글을 남겨 놓는 것이 좋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꼭 작가들만이 그런 조언을 하는 것도 아니다. 지난 학기부터 수업시간에 내가 인용하는 어떤 연구 결과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이 있다.
미국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사는가를 고민하던 한 연구자가 1,500여 명이 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행복에 대한 인터뷰를 한 후 그것을 정리해서 책으로 냈다. Pillemer 라는 박사였는데, 그가 낸 책의 제목은 "30 Lessons for Living"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그의 결론, 즉 잘 살기 위한 조언은 다음과 같다.
1. Stop worrying so much.
2. In relationships, sweat the small stuff.
3. Don't sacrifice your relationship for your children.
4. People who share core values typically have better marriages.
5. Communicate early, communicate often.
6. Approach marriage as a discipline.
7. Take time to craft the story of your life.
대개 결혼을 했거나 한 적이 있던 노인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결혼 중 배우자와의 관계, 자녀들과 관련된 내용들이 있다. 이 중에서 내 눈에 들어 온 것은 맨 마지막 조언이다.
"시간을 들여 당신 삶의 이야기를 만들라."
이 연구에 참여한 노인들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으로 촬영해 본 적이 없어서 이런 조언을 했을까. 아니, 미국에서 살고 있는 노인들은 훨씬 더 시간이 많고 할 일이 없어서 이런 삶에 대한 조언을 했을까...
나는 글을 자주 쓰는 것도 아니고, 대단히 잘 쓰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완전히 사적인 것도 그렇다고 공적인 것도 아닌 어중간한 것들을 이 블로그에 가끔 끄적이고 있지만, 이 공간에 잡문이라면 잡문이랄 수 있는 짧은 글들을 쓰면서 스스로 얻게 되는 것이 많다.
우선 그저 휙...하고 기억에서 사라질 경험이나 생각들을 기록해 둘 수 있어서 좋고, 이 기록과정에서 생각을 정리하면서 얽힌 것들을 풀어 놓는 기분을 갖게 될 때도 있다. 몇년 전에 써 놓은 것을 읽으면서 오타나 어색한 것들을 발견하는 것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이기도 하지만 내가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지지 않았나 하는 쓸데없는 자부심이 생길 때도 있다. 물론 이 중에서 가장 큰 장점은 내가 경험하고, 보고 들은 것들을 그래도 흘려 보내지 않고 그 일부분이라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다음(daum)"이라는 회사가 문을 닫아 블로그 기능이 없어지지 않는 한은 눈덩이가 조금씩 커지듯 계속해서 나의 기록들이 쌓여질 것이다. (이전에 한번 다른 사이트를 이용하다가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백업을 미리 해 놓지 않아 상당한 글들을 잃어 버린 경험이 있다.) 지금도 벌써 10년 전에 가까운 것들을 이 곳에서 찾을 수 있으니 은행 잔고는 얼마 안될지라도 여기의 잔고는 꽤 두둑한 편인 셈이다.
어제는 나의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유빈이를 픽업하기 위해 유빈이 학교 쪽으로 운전을 하는데 날씨가 너무 좋았다. 하루의 상당 시간을 유빈이 통학과 나의 출퇴근을 위한 운전에 소모하고 있는데, 그래도 그 덕에 전에 없이 덴버 다운타운을 누비는 호사(!)를 하고 있다.
전철로 통학을 할때는 도심 외곽쪽에서 다운타운 외곽에 위치한 학교로 움직였기 때문에 볼거리라고는 붐비는 고속도로 (I-25)가 대부분이었는데, 이제는 다운타운에 위치한 공원이며 빌딩들, 바삐 출퇴근을 하는 회사원들을 자주 본다.
이 일도 계속하면 큰 감흥 없는 예사 출퇴근 길이겠지만 아직까지는 볼거리도 많은 길이다. 특히 출퇴근 시간에는 어떤 길이 언제 막힐지 몰라 스마트폰의 구글맵을 매일 같이 확인하면서 그 구글맵이 제시해 주는 길을 이용하고 있는데, 종종 한번도 가지 않은 길을 보여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곳에 몇년 살았어도 돌아 볼 일이 없었던 동네를 헤치고 다니는데, 그것도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다.
어제는 공원을 지나고 숲길을 지나는데 길이 꽤 괜찮아 보였고, 조금씩 단풍든 나무들은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었다. 아마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더 근사한 모양이 될 듯 싶은 길이다.
혜빈이는 올 해도 합창단에 지원을 했다.
일주일에 한번, 아침에 한시간 먼저 학교에 가 있어야 하는데 제 친한 친구가 있어서 그런지 즐거운 기분으로 가곤한다. 4학년때는 월요일이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거의 대부분의 화요일 아침이 합창단 연습이다.
7시 55분 정도에 학교에 도착할 수 있도록 출발해서 학교 바로 앞에서 내려 주는데, 매일같이 들고 다니는 물통 하나를 들고 신나게 들어 가는 모습이다. 어떤 부모가 저 모습에 흐뭇하지 않을까.
아마 이런 기억들, 즉 애들을 통학시켜주고 그런 길에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들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5년 후, 10년 후에 기억되는 것은 "그땐 힘들었어," "그래도 재밌었어," 혹은 "그럴때도 있었지"와 같은 두세 단어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몇자 또 끄적여 본다.
이번 학기부터 매주 화요일에 유빈이가 새로 오케스트라에 합류했다. 매 1년마다 오디션으로 수준에 맞게 뽑아서 하기 때문에 일단 1년 정도 하는 것이다. 매주 화요일 방과 후 (저녁 5시 반)에 진행되는 것인데, 다행 지금 다니는 학교에서 한다.
화요일이면 나나 아내가 방과 후에 유빈이를 챙겨서 다시 학교로 데리고 오고,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기다리는 시간은 앞으로 나의 작문 시간이 될 가능성이 많다.
지금은 복도에 앉아 있지만, 식당이 반대쪽에 있다고 하니 다음 주부터는 아마도 그곳에서...
이렇게 내 삶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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