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현 사는 법

암기 과목

남궁Namgung 2010. 12. 16. 12:37

1.

몇십년 내내 첫 중간고사 문제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출제하셨던 철학과 교수님이 계셨다. 물론, 신입생들은 선배들의 말을 듣고, 모두 그 문제에 대해서만 준비를 했었다.

 

시험 당일.

 

그 교수님이 들어 오셔서 칠판에 문제를 적으시는데... 이런... 문제가 ㅊ으로 시작해야 하는데, ㄷ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학생들이 모두 당황스러워 하는 가운데, 다 적힌 문제는...

 

"도대체 철학이란 무엇인가?"

 

 

2.

나는 정말이지, 외우는 시험 과목은 대대로(?) 못했다. 사회, 도덕, 정치경제, 역사 등등 다른 과목들도 잘한 것은 아니었지만, 소위 말했던 "암기과목"은 정말로 내겐 "쥐약"이었다. 그나마 평소에 끄적여서 알고 있는 공식으로 해결하는 과목이나, 평소에 한개 두개 외웠던 단어를 조합하면 풀수 있는 과목들이 나았지, 짧은 기간에 외워서 그것을 그대로 풀어 내어야 하는 시험은 정말이지 하기도 싫었고, 그래서 더더욱 못하는 악순환을 수년 동안 계속해야 했다.

 

여기 와서 공부하면서 그나마 바둥바둥 대면서도 버틸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아마도 대개의 과제가 평소에 책이나 저널 등을 읽어서 페이퍼를 제출하거나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과제들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있다. 여기서도 시험기간만 되면 되지도 않는 글들을 적어서 제출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면, 아마 공부하는 가장 큰 고충 중의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3.

오늘로서 사실상 내게는 2010년 가을 학기가 마무리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페이퍼가 있기는 하지만, 거의 90% 이상 마무리 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내일 학교 가서 간단히 보충해서 내면 될 것이고, 오늘 오후에 있었던 "시험"이 가장 큰 고비이자 마지막 관문이었다.

 

그동안은 시험이 있기는 했어도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오늘 시험을 위해서 준비하는 것은 또 다른 허들이었다. 한 학기 동안 배운 것들, 그것도 수업시간에 다룬 책과 저널 페이지로 따지면 몇천페이지가 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의 것을 시험으로 본다니 참으로 기가 차지도 않을 정도로 막막한 일이건만, 그래도 어쩌랴. 학기 첫시간 부터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고, 학기가 진행 되는 중간 내내 계속적으로 들어 왔기 때문에 "그러니 미리 준비했어야 하는 것 아니니?"라고 누가 묻는다면,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지...

 

암튼, 그렇게 방대한 분량이더라도, 2주전 정도에 교수님이 대략 어느 분야에서 나올 것인지 운을 띄워 주시기는 했다. (그래봐야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정리"였으니...)

 

참으로 오랜만에 준비한 것 같은데, 지난 주부터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중심으로 요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지난 주말 경에 완성되어, 그것을 "암기"해야 하는 과정에 들어섰었다.

 

한글로도 외우지 못하고, 외우기를 싫어했던 사람이 영어로 된 이것들을 외우려니 오죽했을까...

 

 

<저렇게 20페이지를 만들었는데... 밑줄친다고 시험 잘보는 것이었으면, 숯을 가져다가서라도 공부하겠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 이렇게 시험을 다 치르고 왔다. 대개의 시험이 다 그렇지만, 특히나 이런 암기 과목, 그 중에서 서술형으로 된 것들을 다 쏟아 붓고 나오는 기분은 참으로 허탈하다. 더구나 그 쏟아 분 것이 제대로 된 것이면 모르겠는데, 아무 것이나 꺼집어 내어 쏟아 부은 경우라도 더더구나 허무하다.

 

자기 노트북을 가져와서 워드에 치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다른 친구들도 여기 저기서 한숨을 쉬는 것 보니 내게만 어렵고 황당한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다같이 못했으면 하고 바라는 이 모습도 우습다.

 

어쨌든, 속 시원한 것은 사실이다. 여느 과정 대부분에서 다 그랬듯이, 다시 한 과정을 넘겼고, 그래서 홀가분하다.

 

 

4.

이제 며칠 쉬고, 쉬면서 한해도 정리하고, 나의 남은 과정들도 다시 계획해 봐야겠다.

 

돌이켜 보면, 만만하게 시작했던 학기였는데, 중간중간 진행되면서 조금씩 고전했던 또다른 한 학기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나의 나사가 좀 풀어지지지 않았는지 다시 점검도 해야 할 것이고, 핸들을 제 방향으로 맞춰 잡고 있는지도 꼼꼼히 확인해야겠다.

 

무엇보다, 한 학기 수고한 나의 지친 영혼(?)을 위해, 그리고 그 하기 싫어하고 하지도 못하는 "암기"를 하느라고 고생한 나의 브레인을 위해, 기네스 몇캔을 비워주는 서비스부터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