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빈이 사는 법

보물섬 외 십여권

남궁Namgung 2009. 12. 11. 12:48

지금은 문도 닫았지만, 고향에서 우리 집은 OO서점이었다. (OO란은 아버지 함자로 채워졌었다.)

 

간판은 OO서점으로 붙였지만, 동네분들은 흔히 "OO사"라고더 자주 부르시곤 했고, 나나 누나, 형도 대개 "OO사 딸, 첫째, 둘째 아들" 하는 식으로 불렸다. 나뿐 아니라 부모님께서 가게를 하는 친구들은 대부분 그렇게 불렸지만, 나는 그 호칭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왜 OO서점 이라고 간판을 부치셨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간판을 부치실 당시 우리 가게의 "주력 상품"이 책이나 참고서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지만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한번도 직접 여쭤 보지 못했다. 나와 여섯살 차이나는 누나가 집 가까이 있던 "은산 국민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학교의 총 학생수가 천명이 넘었던 때가 있었다고 하던데, 내가 다닐 때는 육백여명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그만큼 몇년 사이에 가게의 수요자가 많이 줄었고, 또 버스가 거의 대부분 교통 수단이던, 누나와 형 세대와는 달리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조금씩 시골 분들도 자동차를 소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가까운 읍내에서 "물건을 떼어다가" 거기에 이윤을 붙여 장사하시던 아버지의 사업도 그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국민학교, 중학교 저학년 때만해도 가게의 한편에 참고서와 책들로 가득했었는데, 그 후로는 그 차지하는 자리가 조금씩 줄었고, 아마도 내가 대학생 이후로는 "OO서점"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가게에 진열되거나 팔리는 책의 양은 미미했다. 대부분 학용품이나 다른 생활용품 등이 판매물품의 대부분이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맨 처음 장사를 시작하실때 다루셨다는 벽지와 장판지가 나중에는 주력 상품으로 전환되었던 것 같다. 세상사가 돌고 도는 것인지는 몰라도, 시골의 교육환경과 생활환경의 변화와 함께 적어도 아버지의 사업 역사도 초기에 당신의 아버지 (내겐 할아버지)와 5일장을 도시며 지물을 파시던 그 이전으로 되돌아 가신 것 아닌가 생각도 해 본다.

 

효도라는 말을 꺼내기 민망할 정도로 아버지와 살갑게 대화 나누고, 자주 만나 뵙기도 전에 떠나셔서, 그 이름만으로도 찡한 아버지의 사업 얘기를 꺼내는 것은, 그 예전, 정말 "OO서점"이 서점 다웠을 때가 생각나서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그 그림, 나폴레옹이 탄 말이 앞다리를 번쩍 들고 있고, 나폴레옹은 "전진"하고 외치는 듯한 그림이 그려진 동아출판사의 완전정복 참고서 같은 학습 교재나 월간 중앙과 같은 잡지 등은 거의 대부분 부여에서 거래를 하고 있던 서점에서 아버지께서 "마진"을 남기고 가져다 파시는 것이었다. 참고서는 한 학기에 한번 오기 때문에 학기초를 제외하면 큰 변함이 없지만, 잡지는 매달 가져다 놓으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월간지를 가져다 놓으시는 매달 20일 전후 쯤이면 가게의 잡지 코너에 항상 눈이 가게 마련이었다.

 

그러다가, 학교에 다녀 와서 보면, 그 잡지 코너에 어린이 만화 잡지, 지금은 거의 이름도 잊었지만, 어린이 월간중앙, 보물섬 같은 잡지가 많이 꽂혀 있으면 그것을 종류별로 다 꺼내서 위층으로 가져 올라가, 그날 저녁은 실컷 연재만화며 잡지를 보곤 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다 본 후에 그날 저녁이나 다음 날 다시 제자리에 꽂아 놓았고...

 

아버지나 어머니도 그렇게 한꺼번에 쌓아 놓고 월간 만화책 보는 것을 나무래시거나 못하게 하시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매달 매달 책을 좋아라 보던 것도, 아마 고등학교를 기숙사로 들어가면서 그만 두게 되었는데, 그렇게 집과 떨어지지 않았더래도 "애들" 만화와는 떨어지게 되었을 때였으리라... (그 후론 지금까지도 만화책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먼나라 이웃나라" 같은 식의 학습만화는 좀 봤었는데, 일간 신문의 만평을 제외하고는 다른 만화는 최근에 본 기억이 없다.)

  


 

유빈이네 학교, 아니 아마도 이나라 전 초등학교 (그 이상의 학교는 모르겠고)에는 한달에 한번 정도 주기로 스콜래스틱 (Scholastic)이라는 회사에서 보내는 책 상품 전단지를 집으로 보낸다. 인쇄기름 냄새가 확 풍기고, 종이질도 한참 떨어지게 보여서 그 전단지를 처음 받았을 때는 '이 회사 삼류회사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알고 보니 꽤나 유명한 회사다. 판매 방식도 독특해서, 반드시 학교를 중개로 학생들에게 전단지를 보내고, 학교에서는 다시 신청서와 돈(체크만 받지만)을 그 회사에 보내는 식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주문한 책은 다시 학교로 보내져서, 학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책을 전달해서 집으로 책을 가져온다.

 

특이할 만한 것은, 아니 당연할 수도 있는 것은, 학생들이 그렇게 책을 많이 주문할 수록 회사로부터 이 학교나 교실에 제공되는 무료 학습 교재나 책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이득이 되도록 사업을 하고 있고, 전단지 상의 책들 가격도 일반 서점에 비해 그리 비싸지 않은데다가,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책의 수준이나 품질도 꽤 만족할만하다. 그래서 그 전단지를 가져올 때마다 몇권씩은 꼭 사주는데, 아마 이놈 유빈이는 교실에서 다른 친구들과 책을 함께 전달 받으니, 그 권수나 부피에도 신경이 많이 쓰이는 모양이다. 

 

전단지의 책 표지와 제목을 보며 졸라대는 책들이 있지만, 그 희망사항을 종합하면 "많이 사달라"는 것이다. 다른 친구들이 한아름 가져 가는데, 저만 한두권 딸랑 가져오게 할 수 없어, 나도 실제로 권수가 신경쓰이기도 한다. 아마 이것이 이 회사에서 노리는 전략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책의 품질이나 내용면에서도 일반 서점에서 파는 것과 다를 것 없고, 가격면에서는 오히려 저렴한 듯 하여 유빈이를 위해 몇권 골라주면서 일부러 필요없는 구매한다고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내일 주문한 슬립을 가져가면 유빈이는 또다시 책 도착할 날을 기다릴 것이고, 도착하면 그 책들로 또 며칠은 싱글벙글 할 것이다.

 

시간은 많이 흘렀고, 방식은 한참 다를지 몰라도, 그때, 내가 학교 다녀와서 가게 한켠에 꽂아 있던 "보물섬 외 십여권"의 만화책을 반가워 하며 낄낄거리고 읽던 나의 어린 시절과 큰 다를 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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