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게 지내던 사람들과 헤어짐을 경험할 때면 항상 기억나는 추억이 있다.
"국민학교" 3학년 혹은 4학년 때쯤 겨울방학이었을 것이다. 경희대 한의대에서 우리 동네 (아! 부여 은산)에 의료 봉사를 나왔던 적이 있는데, 의료봉사와 함께 방학동안 무료한 마을 아이들에게 노래며 여러가지를 가르치는 "봉사"도 함께 실시한 적이 있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경희대에 있는 어떤 동호회가 아닐까 싶은데, 아무튼 그 봉사단이 마을에 도착한 날, 회관에서 의료진이 도착했다는 방송이 나왔고, 동네 전봇대 곳곳에는 "국민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봉사활동도 있으니, 국민학교로 오면 갖가지 재미난 것들을 가르쳐 준다는 전단지도 붙어 있었다.
기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무엇을 배웠는지도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 몇몇과 함께 그곳에 가서 노래도 부르고 이런 저런 놀이를 하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 "서울 누나들"은 얼굴 새까맣고, 코 질질 흘리는 시골 애들에게 아주 친절히 대해 주어서, 그 봉사단과 그 "누나들"이 동네를 떠나는 날에는 너무 서운해 정작 얼굴 바라보고 인사도 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 봉사단이 떠난 후, 미리 받아 놓은 주소로 한두번 편지 연락도 하곤 했었는데, 얼마가 지나서는 그마저도 끊겼었다. 하지만 그 겨울에 가졌던 특별한 경험과 추억은 아직도 소중히, 감사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다른 사람들이 대부분 겪을 정도의 만남과 헤어짐을 되풀이 하면서, 그때 그 어렸을 때, 아쉬운 마음에 손을 흔들고 작별인사도 못할 정도의 순진함은 조금씩 없어지고, 오히려 만남과 헤어짐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상황에 따라 그 헤어짐을 스스로 다스리는 "기술"도 생긴 듯 하다.
오늘 아침, 내가 칭하기로 "클레이튼 부녀회장님"댁 (나만 그렇게 부른다)이 한국으로 귀국하셨다. 우리나라의 한 기업에서 오셔서 3년을 공부하시고, 생활하시다가 한국으로 되돌아 가신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우리 가족이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나에게 차를 파셨던 분이 바로 이 "부녀회장"님께 열쇠를 맡기고 귀국하셔서 그 열쇠를 건네 받기 위해 만나면서 우리 가족과 인연이 시작되었었다.
친절히도 도착한 다음 날부터 장 봐야할 마켓이며, 은행 계좌 개설과 자동차 보험 등 초기 정착하는데 필요한 이것저것을 많이 도와주셨다. 예전에 다른 나라에서 잠시 살았던 그 "오만"으로 아무의 도움 없이 스스로 정착하고자 했던 것이 나의 계획이었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이분들 도움이 없었다면 꽤 어렵게 여기 생활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 후로도 아내와 "부녀회장님"은 서로 자주 왕래하면서 생활에 관한 조언이나 정보를 많이 건네 주셨고, 최근에 우리가 이사할 때는, 당신들께서 곧 귀국하신다면서 우리에게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셔서 이사 온 집에 살림살이 장만하는데도 많은 부담을 덜어 주셨다.
알고 보니, 이 "부녀회장님"은 우리 가족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분들에게도 정을 많이 주시는 분이었던 모양이다. 다른 지역까지는 모르더라도, 클레이튼에 새로 와서 이것저것 도움이 필요한 분들에게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도와 주셔서, 나 같은 뱁새 생각에는 "굳이 저렇게까지 안하셔도 되실텐데..."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당연, 이렇게 여러가지로 많은 분들을 도와주셨으니, 한국으로 되돌아 가신다는 소식에 여러 가족들이 서운해하고 아쉬워한다. 당장 아내만 해도, 눈물 글썽이면서 서운함을 감추지 않고, 나도 그 도움 제대로 갚지도 못하고 보내드려야 해서 죄송스럽기만 하다.
내가 그 가족분들에게 무슨 소망을 말할 형편이며 처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윤차장님과 "부녀회장님", 그리고 단아의 무궁한 발전과 가족의 행복이 늘 함께 하시길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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