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그렇겠지만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졸업 이후와 중학교 입학 전까지의 사이는 상당한 시간이 있어서 실컷 놀 수 있는 그런 때가 있었다. 물론 중학교와 고등학교 사이, 고등학교 졸업 후와 대학 입학 전까지의 사이도 비슷할 것 같다. 당시는 "국민학생"들이 다닐만한 과외 학원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때이기도 했고, 시골인지라 학부모의 학구열이라는 것도 그저 정규 학교에서 제공하는 교육에 대한 관심이 거의 전부였을 때였다.
그런데 그때, 중학교 입학 하기 전에 실컷 놀 수 있는 그때, 나는 아버지로부터 "특별 과외"를 받아야 했다. 조그만 문방구 겸 서점을 운영하던 가게의 한쪽 구석에 있던 조그만 골방에서 아버지는 내게 영어 알파벳을 가르쳐 주셨다. 지금은 영어 유치원이라는 것이 있을 정도지만, 우리 때는 중학교 1학년 입학해서 배우기 시작하던 것이 영어 알파벳 아니었던가! 그런데 아버지는 지금 말로 중학교 입학도 전에 선행학습을 시키신 것이다.
네줄이 그어진 공책에 대문자, 소문자를 쓰고 외우고, 거기에 필기체까지 쓰는 연습을 했었다.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에게 들어 내놓고 자상하지 않았던 성격이신지라 가르치실 때도 그저 쓰라고 공책을 내밀어 주시고, 당신께서는 신문을 보시거나 텔레비젼을 보셨던 것 같다. (다행, "나는 떡을 썰테니 너는 글을 써봐라"라는 시험을 내지는 않으셨다!)
그래도 다른 친구들보다 알파벳 먼저 외우고 입학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는지, 다른 과목보다는 영어를 좋아했고, 점수도 어느정도 잘 나왔던 것 같다. (물론, 아리따운 영어 선생님 덕이 가장 컸겠지만...)
이제는 내가 유빈이를 "선행학습" 시키고 있다. 지난 6월 말경에 방학을 줘서 8월 말경에 개학을 하니 두달 가까이를 집에서 보내게 되는데, 그나마 SummerQuest라는 섬머 프로그램이 있어서 그것을 6주 정도 다녔고, 이번 주에는 VBS라는 여름 성경학교가 있어서 알차게 시간을 보냈는데, 이제 개학 때까지는 집에서만 지내야 한다.
형편이 되면 여러 사설 기관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에 보낼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도 없고 해서 이전부터 조금씩 하던 Workbook을 며칠전부터 다시 꺼냈다. 나의 아버지가 내게 하시던 선행학습과 달라진 점이라면, 우선 내가 약간 더 자상해졌다는 것이겠고,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같이 워크북을 하다 보면 가끔 내가 모르는 단어가 있을 정도니!
일전에 읽은 "Outliers"라는 책에는 캐나다 하키 선수들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같은 해 1월 1일 부터 12월 31일까지 출생한 애들을 한 학년제로 하고 있는 캐나다에서, 유명 하키선수들을 보니 유독 1월부터 3월까지 출생한 선수들이 많은 것을 발견한 한 학자가 그 이유를 파악하려 한 사례였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학교 시스템이었다. 1월 1일부터 12월 31일사이에 출생한 학생들을 한 학년으로 할 경우, (특히 어렸을때는) 연초에 출생한 하키선수들이 체격이 클 것이고, 그렇다면 6월 이후에 출생한 동급생보다 체력적으로, 체격적으로 경기에 유리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스스로 다른 동급생보다 잘한다는 자부감도 생기고 코치로부터 받는 관심도 많아 질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잘하던 학생들이 더 많은 관심과 교육으로 더 잘하게 되고, 결국에는 통계적으로도 연초에 출생한 학생들이 프로 선수등으로 유명해 진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교육의 큰 문제점 중의 하나라면 바로 "선행학습"일 것이다. 나만해도 고등학교 입학 전에 "대전권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애들은 정석 1 한권을 다 떼고 입학한다더라"라는 "괴소문"에 얼마나 가슴조려했던가. 지금은 대학생을 제외한 전 학교에서 1학년때 이미 2학년 것을, 2학년때는 이미 3학년때 것을 공부해야 하는 선행학습이 아예 자리잡은 것 같다. 이런 선행학습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캐나다 하키 선수들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 싶다.
미리 좀 공부해 가면 아무래도 수업 듣는 것이 수월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성적이 비교적 나을 것이고, 그렇다면 선생님들이 좀 더 관심을 갖고 더 가르쳐 주실 것이며, 그런 선순환을 통해 "성적 잘 받는 학생"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이론 아닐까. 그래서 서로 자기 자식 그렇게 만들려고 보니, 대부분의 부모가 자기 자식들을 선행학습 시킨 것이고, 그러다 보니 조금씩 조금씩 선행하는 정도가 지나치면서 문제가 되는 것 아닐까.
나도 그런 문제점 잘 알지만, 막상 내 아이가 조금씩 자라면서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고, 다른 아이들과 경쟁할 때가 되니, 조금이라도 유리한 입장에서 시작할 수 있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당연 생긴다. 특히나, 아무래도 언어라는 기본적인 무기가 공평하지 않은 처지인지라 조금이라도 더 배워서 1학년을 시작하고,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여기에서 공부한다고 해서 다른 애들보다 떨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당연히 생긴다.
아마,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그 조그만 방에, 조그만 밥상을 놓고 알파벳을 쓸 공책을 내미시던 나의 아버지 마음이 그러하지 않았을까...
<유빈이가 하고 있는 워크북. 그래도 영어는 꽤 하는데, 수학이 아직 딸린다. 7-4가 12이라고 말할때는 속이 약간 뒤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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