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기는 (거의)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5월도 중순을 지났다. 한동안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온을 보이면서 오락가락하는 듯한 날씨도 오늘은 아주 화창하고 완연한 봄날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앞뜰의 큰 나무에서는 눈을 씻고 보아야 잎이 트는 것을 한두 개 볼 수 있었는데, 오늘 쳐다본 이 나무에는 금세 밝은 녹색을 띤 잎사귀들이 셀 수 없이 가지를 트고 나와 있었다. 굵게 자랐지만 쓸모없는 방향으로 자라던 나뭇가지 몇 개를 쳐주려던 계획을 가을 이후로 미뤄야 할 듯싶다.
무슨 기준으로 정해 놓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지역에서 공식적인 여름은 6월 20일에 시작하고 여름의 마지막 날은 9월 22일이라고 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도 여름의 시작은 한달이 넘게 남았지만 지금도 초여름이라는 표현이 그리 낯설거나 그릇된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방금 일기예보를 보니 이번 주 내내 섭씨로 30도를 넘거나 육박하는 날이 대부분이니 더욱 그러하다.
낮에는 집 뒤로 난 데크에 자리한 테이블에 가서 일을 처리했다. 후배와 과 동료 교수 이렇게 셋이서 쓰고 있는 논문이 있는데, 후배가 엊그제 보낸 의견을 바탕으로 마무리 수정 작업을 하고 있다. 오랜만에 쓰는 논문이어서인지 아무래도 진행 속도가 예전에 비해 더딘 것을 몸소 실감하고 있다. 그래도 훌륭한 후배와 동료의 도움으로 많이 진척되어서 몇 주 이내로 적당한 저널에 송고할 수 있을 것 같다.
교수로서 일하면서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에 많은 신경을 써 왔지만, 학술적인 논문을 지속적으로 쓰는 일에는 비교적 게을리 하지 않았나 되돌아보게 된다. 이번 기회를 계기로 "초심"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고,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집중해서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닌가 반성도 해 본다. 그간 부지런히 일하지 않은 덕(?)에 학교 프로그램 평가 보고서도 이번 주 내로 작성해야 하고, 3주 후면 시작되는 여름학기 과목들에 대한 업데이트 작업도 마무리해야 한다. 대부분 처리를 해서 그 양이 많지는 않지만, 이번 주 초에는 모든 과목의 성적을 학교 시스템에 입력하는 일도 중요하다.
하긴 해이해지거나 느슨해지지 않도록 꾸준히 할 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자꾸 생각되는 때이다. 한동안 실업률이 3% 중반대로 이곳 현직 대통령이 역사에 유례없는 경기 호황이라고 떵떵거리던 것이 불과 몇 달 전인데, 이 코로나바이러스 사태 이후로 최근의 실업률이 거의 15%에 달하고 있다. 이전보다 5배 정도의 사람들이 직업을 잃고 돈벌이를 하지 못하고 있다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일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백신이나 치료제 혹은 다른 이유 등으로 완전히 박멸되면 모두가 이전의 직업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최상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직업을 찾지 못하고 경제적 고통을 계속 겪어야 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만만치 않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그래도 월급 꼬박꼬박 나오면서 학생들과 소통하고, 갑작스런 환경에서 힘들어하는 일부 학생들을 여러 형태로 도울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영향력 있는 일이고, 나의 결정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장래에 대단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점까지 생각에 미치면 나의 직업에 진지해지기도 하고 나아가 엄숙해지기도 한다.
여름학기와 가을학기의 과목들 모두가 이전에 가르쳐왔던 과목들이지만, 이런 혼란스러운 분위기에서는 더욱더 신중하고 공들여 준비해야 함을 절감하고 있다. 처음 대학생활을 시작하거나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들이 겪을 불확실성과 불안을 따뜻이 감싸고 조언해 줄 준비도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이같은 특이한 상황에 나름대로 적응들을 하고 있어 다행이다. 혜빈이는 지금같은 상황이 아니었으면 내일부터 시작되는 한주가 마지막 주가 될 것이었다. 유빈이는 한 주를 더해서 5월의 마지막 주를 학년의 마지막으로 보냈을 터인데, 물론 집에서 조용히 보내게 되었다.
엊그제 아내와 캐슬락에 가는 길에 따라 나서던 혜빈이는 마스크를 계속 쓰고 다니는 것이 불편했는지, 그 이후로 한두 번 나나 아내를 따라 쇼핑을 나가겠냐는 제안에 모두 부정의 의사표시를 하고 있다. 오늘은 내가 밖에서 논문을 고치고 있는 동안 수영복 차림으로 큰 수건을 들고 나와 선탠을 한다며 데크 한가운데에 30여분 정도 눕다가 들어갔다. 집 안에만 있으니 햇볕을 받을 일이 많지 않아 일부러 하는 것 같은데, 아마도 어느 소셜미디어에서 듣거나 본 것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나름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으니 기특한 일이다.
유빈이는 두달 넘게 집 밖을 나가지 않고 있는데, 오는 수요일에 학교에서 시간대 별로 학생들에게 앨범(yearbook)을 나누어 준다고 하니 그때는 따라간다고 몇 번이고 재확인을 하고 있다. 엊그제 학교에서 온라인으로 주니어 프로젝트 영화가 평가가 좋았는지, 가장 훌륭한 감독(Outstanding Director) 상을 받았다고 좋아하며 나와 아내에게 자랑을 하기도 했다. 나나 아내에게 미리 말하지도 않아 그런 행사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온라인에서 수여되는 화면을 사진으로 찍어서 좋아라 보여주는 것이었다.
예전같으면 학교의 강당에서 과의 학생, 교사, 학부모들이 모여서 치렀을 행사에서 수여되었을 것인데, 올해는 물론 온라인으로 대체되었나 보다. 이전의 것보다는 작품의 질이 크게 향상되었다고는 생각했지만, 유빈이의 다른 친구들 작품들도 만만치 않아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 같은 상황에서 유빈이한테는 물론이고 나나 아내에게도 큰 선물이 되었다.
조금씩 가게나 병원, 공공기관이나 공원 등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있다고 한다. 확진자나 사망자, 병원에의 입원환자 수 등 여러가지 지료상으로 상황이 호전되고는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언제 이 상황이 완전히 종결될 수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최근 한국에서 보였던 것과 같이 한두 명의 보균자로도 수십, 수백 명이 삽시간에 감염될 수 있기 때문에 이곳의 의사결정자들도 아주 조심하고 있는 듯싶다.
안전한 상황이 되면 그리고 이 같은 상황이 한두달 정도에 찾아온다면, 아이들과 아내의 그간 고생을 생각해 가까운 여행이라도 하면서 서로에게 위안과 격려가 되는 조그만 이벤트를 했으면 좋겠다. 과연 나의 이 작은 소망이 이뤄질 수 있을지 계속 기록하며 기다려 본다.
'남궁현 사는 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Fresh Air (0) | 2020.05.31 |
---|---|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코로나바이러스 이후 10) (0) | 2020.05.25 |
Life goes on.(코로나바이러스 이후 8) (0) | 2020.05.15 |
털고, 쓸고, 닦자(코로나바이러스 이후 7) (0) | 2020.04.28 |
Coming Home(코로나바이러스 이후 6) (0) | 2020.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