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작게 보이지만 어렸을 적 동네에 있던 개울 ("보통"이라 불렀다)은 무척 크고 물살도 세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날 좋은 여름이면 동네 애들이 몰려 들어 붐빌 때도 있었고, 어느 집이건 목욕 시설이 없거나 부족했던 1980년대의 동네 어른들에게는 밤에 샤워장으로 변하기도 했던 곳이다.
조그만 수영복을 입고 수중보가 설치된 아래와 위를 오르 내리며 여름동안에 친구들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강한 햇살에 살갗이 벗겨지는 일은 매해 겪는 일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선크림 같은 걱정도 없었다.
그 개울에서 하는 일은 애들과 물장난을 하고 수영을 하는 것도 있었지만, 어항을 물 속에 설치해서 조그만 물고기를 잡는 것도 큰 일 중의 하나였다. 당시 아버지가 운영하던 가게에서는 유리로 된 어항을 팔았었다 (나중에는 비닐로 된 것도 나왔다). 물고기들이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진 50원 짜리 "라면땅"이나 집에서 먹는 된장을 조금 가져다가 어항 안에 넣은 후, 그 어항을 고기들이 많을 것으로 보이는 곳에 넣어 놓고 10분에서 20분 정도 기다리는 것이 고기잡이 과정의 전부였다.
그리고 다시 어항이 설치된 곳으로 가보면 물과 겹쳐져 어항은 잘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한군데에 물고기들이 바글바글하면서 몰려 있으면, 바로 거기가 어항이 설치된 곳이었다. 어쩌다가 다른 애들이 설치한 어항을 발견하지 못하고 실수로 밟아 발을 베이는 친구들도 있었다.
운이 좋을 때는 그 조그만 어항이 꽉 찰 정도로 작은 물고기가 빠져 나오려고 아둥바둥 하는 것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봐야 그 잡은 물고기로 특별히 하는 일도 없었다. 죄없는 물고기들을 물없는 곳에 두어 를 그냥 죽이는 경우도 있었고, 어디서 봤다고 배를 터서 돌멩이에 올려 오징어처럼 말리려고 했던 적도 많다.
그러다가 한 번은 그 고기들을 잡아 할머니에게로 가져가 고기로 요리를 해 달라고 했던 적이 있다.
당시 고향집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운영하는 가게가 있었고, 이 가게에서 약 200여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우리 가족이 "안집"이라 불리던 또 다른 집이 있었다. 이 안집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살으셨다. 처음에는 모든 취식을 이 안집에서 하고 잠도 이곳에서 잤었는데 1층이던 가게 건물에 2층을 올려 방을 들이면서 주방도 설치가 되었고, 어머니는 이 가게에서 살림을 하셨다.
내가 물고기를 잡아 할머니께로 가져갔던 때가 가게 2층이 있었던 때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가게에 주방 시설이 있었던 때라고 하더라도 그 물고기를 가져가 어머니에게 요리를 해 달라고 하면 분명 쓸데없는 얘기를 한다고 혼났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할머니께로 가져갔었을텐데, 할머니는 그 고기배를 갈라 속을 꺼내고 아주 작은 냄비에 고추가루며 양념을 해서 (마치 고등어 요리하시듯) 주셨다.
지금도 생선 요리를 많이 찾아서 먹는 편이 아닌데, 그때는 더했을 것이다. 할머니께서 요리를 해 주시기는 했는데, 그 민물고기에서 비린내가 많이 나 거의 먹지 않고 그냥 버렸던 기억이 있다.
누나나 형에 비해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기억이 많지는 않은 편이지만 그래도 다른 여러 추억들이 많이 있을텐데 왜 유독 이 기억이 지금까지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부모님의 이성적인 판단에 따른 교육에 비하면 할아버지, 할머니의 교육 (혹은 사랑)은 거의 무차별적이고 의심과 질문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의 어머니 뿐 아니라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어떤 어머니라도 분명 "이 물고기 먹지도 못하는데 뭐하러 가져왔냐?"고, 물고기 가져다 버리라고 하셨을텐데, 할머니는 먹지 않거나 못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손자가 해 달라고 하니까 그걸 들어주셨던 것이다.
지난 여름에 오셨던 장모님께서 약 3개월 정도 이곳에 계시다가 오늘 아침 한국으로 귀국길에 오르셨다. (2016. 9. 8.)
거의 팔순이 되셨는데도 혼자 건강히 움직이시고, 특히 오늘같이 LA에서 비행기를 갈아 타는 귀국길을 혼자 가시는 것을 보면, 과연 저 연세에 저렇게 움직이시는 분이 얼마나 되실까 싶은 생각도 든다.
영국과 한국에서 유빈이와 헤빈이 어렸을 때, 즉 애들한테 제일 손이 많이 가고 힘들 때 장모님께서 거의 다 키워주시서 다시피 하셨다. 그러다가 우리 가족이 훌쩍 이 곳으로 오는 바람에 대전에서 오랫동안 외롭게 지내셨었다. 재작년에도 이곳에 오시기는 했었지만 방문 기간이 짧아서 서운했었는데, 올해는 여러 사정이 맞아 떨어져 비교적 애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셨다.
<저 때는 애들도 어렸지만 할머니도 젊으셨다. 위에서부터 유빈이 한살때와 다섯살때>
<올 여름 캠핑 갔을 때. 이제 혜빈이가 할머니만큼 키가 크다.>
애들도 처음에는 할머니와 지내는 것을 약간 어색해하고 수줍어 하더니 금새 할머니와 장난을 그치지 않는다. 애들 장난과 재롱을 계속 받아 주시는 것이 쉽지 않으셨을텐데 계속 즐거워 하시는 것을 보면서 나도 흐뭇한 적이 많았다.
장모님 말씀을 가만 들어 보니, 유빈이는 제 아빠나 엄마에게는 잘 얘기하지 않는 것을 제 할머니에게는 말하는 경우도 있었나 보다. 한창 사춘기 절정을 지나고 있는 유빈에게는 할머니에게 감정적으로 더 가깝게 느껴져서 마음을 열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 봤다.
장모임은 혜빈이 방에서 혜빈이와 같이 주무셨는데, 혜빈이도 제 할머니가 곁에 없으면 밤에 잠을 자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할머니와 붙어 지냈다. 이런 경험을 갖고 자라는 애들이 갈수록 많지 않은 것을 감안한다면 이번 여름은 애들에게도 아주 소중한 경험이었으리라 믿는다.
오랫동안 계시면서 정이 더 들어서 계시다가 새벽에 애들의 인사를 받고 공항으로 향하시면서 눈물을 훔치시는 모습이 아주 짠했지만, 그래도 건강하시니 곧 다른 기회가 있으리라.
유빈이와 혜빈이는 오랫만에 할머니와 여러가지 경험을 했는데, 나중에 나만큼 컸을때 어떤 기억을 갖고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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