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다음 학기에 일할 학교에를 다녀왔다. 몇 주전에도 가서 학과장님 만나 인사하고, 이런 저런 행정적인 일에 대해서 간단한 설명을 들었었는데, 오늘은 내가 쓸 사무실을 정리 좀 하고, 다음 학기에 가르치게 될 과목의 교과서를 받아 오기 위해 갔다.
날이 좀 선선해져서 한낮에도 섭씨 30도를 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항상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은 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침 밥을 먹고 좀 늦게 나가면서도 선크림을 팔과 얼굴에 바르고 나서야 문을 나섰다.
방학 중이라 크게 할 일이 없이 매일 매일을 따분하게 (애들 표현으로 보어링...(boring)) 하게 보내고 있는 유빈이는 나를 따라 같이 학교에 가면 안되겠냐고 계속 조르기에, 데리고 함께 학교로 갔다.
일전에 학교에 다녀 올 때도 이곳의 전철 (light rail)을 타고 갔었는데 오늘도 역시 이 전철을 탔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전철역까지 그리 멀지 않고, 대학까지 가는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는데다가 (약 15분), 학교 바로 앞에 역이 있어 학교 사무실까지도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잇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학교가 다운타운에 위치한 덕(?)에 학교 주차 사정이 좋지 않고, 그런 이유로 많은 교직원과 학생들이 이 전철을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평소 서민임을 뿌듯히 생각하는 (?) 나는, 주차 사정이 좋았어도 이 전철을 애용하며 출퇴근을 할 터였는데, 어쨌든 저렴한 가격으로 (이제 학기가 시작되면 월 $25로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고 하니 아주 싼 가격이다) 학교를 오갈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전철을 타보는 유빈이가 좋은 구경을 할 수도 있었으니 나는 내 할일을 하면서 애들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경험케 해 주는 뿌듯한 전철 승차.
책상 두개, 책장 하나 케비넷 하나만 있는 휑한 사무실에서 유빈이와 함께 책상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놨다. 책상은 이전에 다른 교수가 쓰던 것인 모양인데, 언뜻봐도 5-6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중고 나무책상이다.
"다행 큰 책상이고, 고장난 서랍은 없으니 이것만으로도 만족해야지..." 하는, 최신참 조교수로서의 기특한 생각을 해 봤다. 책장과 캐비넷은 방향이 괜찮은데, 그냥 길기만 한 다른 한 책상은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 지 답이 나오지 않아 일단 옆쪽에 세워 놓고 왔다.
중국 여자분인 학과장님도 출근해 있었던지, 와서 이것저것 설명해 주고 앞으로의 일정도 간략히 얘기해 준다. 원래 성격이 활발하고 적극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이 학교에 오퍼를 받은 후 지금까지 여러가지로 자세하게 도와줘서 내내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 분이다.
그 외 행정일을 보니 캐씨라는 여직원분으로부터 내 ID 카드와 사무실 열쇠를 받아야 할 곳 등을 설명 듣고, 학교 이곳 저곳 빌딩을 다니면서 오늘도 일처리를 두개나 마쳤다!
중간에 시간이 잠시 비어서 유빈이를 데리고 학생 식당에 가서 맥도날드 햄버거를 사 먹었기도 하고, 찌는 햇볕에 지친 유빈이가 전철 역 앞 버거킹에 가서 망고 스무디를 먹고 싶다고 하여 잠시 들러 스무디도 사주고...
일찍 일을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 오는데, 전철 안 내 앞자리에 앉아 창 밖을 쳐다 보는 유빈이를 보니 어쩌면 내가 봐도 꼭 나 어렸을 적 모습일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내가 나를 바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될 정도다.
제 아빠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이곳 저곳 생소한 곳을 돌아 다니며 제 나름대로 적응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가엽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 이것 저것 많이 시켜 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부모 노릇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죄의식도 들고...
아무튼, 덜컹 덜컹 하면서 빨리도 갔다가 천천히 가기도 하는 전철 안에서 보니, 내 자식의 또 다른 옆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대화가 없었어도 내게 많은 생각의 기회를 준 시간이기도 했다.
일전에 한 심리학 교수님의 인터넷 강의 (http://www.youtube.com/watch?v=P3FKHH2RzjI)를 듣다 보니 한 심리학자가 이런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즉, 지난 2001년 9/11 사건 다음 날 미국인들에게 그 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묻고, 수년이 지난 후 같은 사람들에게 그 테러사건 당시 어디에 있었냐고 다시 묻는, 아주 단순한 실험이었다.
그저 어느 평범한 한 날이 아니라, 미국인 모두에게 충격적인 날이므로 대부분 정확히 기억할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런데, 결과는 놀랍게도 처음 (즉 2001년 테러 사건 직후) 대답한 것과 수년 후 대답한 것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아주 객관적인 사실 (그날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다)이고, 충격적인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날과 연관시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할 듯 싶지만, 실상은 사람의 기억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고로 나는, 당시 꽤 유명한 사극으로 기억되는 "여인천하"를 집 거실에서 혼자 보면서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 기억도 틀린 것일지 모르다!)
그렇다면 과거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생각 등은 얼마나 오차가 심할 것인가. 내가 처음 유학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이러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라고 남에게 말을 하거나 지금 글을 쓸 수 있겠지만, 과연 10년 전의 생각에 대한 나의 기억이 얼마나 정확할까.
그렇기에 일기를 쓰고, 사진을 찍는 습관을 갖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 봤다. 아무래도 오늘 있었던 일이나 가졌던 생각을 몇일, 몇주, 혹은 몇년 후에 돌이켜 하는 것 보다는, (몇시간이 지났기는 하겠지만) 같은 날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지 않을까.
내가 오늘 유빈이와 전철 좌석에 마주 앉아 내가 가졌던 생각을 지금 적는 것이, 다소 틀릴 수는 있더라도, 몇 주 후 혹은 몇년 후에 다시 되돌려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정확할 것이다. 아니, 몇 주 혹은 몇 년이 지나면 오늘 같이 전철을 타고 학교를 오갔다는 사실 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글을 좀 잘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잘"이 아니라 "자주"만 되어도 좋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다시 잡는 것이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하긴 "잘" 쓴다는 것이 참으로 모호한 표현이 아니겠는가. 내가 글을 써서 밥 먹고 살 것이 아니라면, 남이 봐서 "잘썼다"라는 글에 집착할 이유가 전혀 없기도 하다.
그것보다는, 오늘 가졌던 생각을 끄젹여 보고, 나중에 다시 읽을 때 "아... 저 때는 내가 저런 생각도 했었구나..." 하며 뇌 속 깊은 곳에 위치한 기억을 끄집어 낼 수 있기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 것인가... 시간이 많아(?) 최근에 글쓰기에 관한 책 몇권을 뒤적여 보고 있는데, 한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Writing grants a means of self-discovery, a way to break through to the fortitude the idiosyncrasies, that make us unique. . . . Start writing to save your life. Stories only happen to those who can tell them. ("Writing Your Life," Lou Willett Stanek, p. 8)
글쓰기를 통해 나를 발견할 수 있고, 나의 삶을 저장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절대 공감한다.
내가 나에 대해, 나의 생각에 대해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해서 그 기간 동안의 삶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만약 그런 시간에도 때론 메모처럼, 때론 수필처럼 내가 글로 남겼더라면 나의 삶에 얼마나 더 이야기 (stories)가 많이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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