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한지도 꽤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여기로 이민 온 것으로 알고 있는 옆집 아주머니는 부지런하시게도 아침마다 낙엽을 긁으신다. 아침에 학교에 가려고 차를 빼노라면 잠옷 비슷한 옷을 입은 채로 낙엽을 긁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자주 본다. 그럴때마다, 아직까지 "적엽량" (이런 표현이 있나?)이 많지 않아 어쩌다가 낙엽을 치우는 나를 보시면서 속으로 얼마나 한심해 하실까 생각도 한다.
오늘도 밖에 나가 보니 그리 많지는 않지만 옆집 아주머니 기준을 적용한다면 무척 지저분하게 떨어져 있는 낙엽이 뒹굴고 있다. "어찌 할까, 좀 더 놔둘까..." 생각 하다가 기분 전환도 할겸 많이 떨어져 있는 곳을 우선 타켓으로 지정하고 긁어서 치웠다. 역시 낙엽 특유의 향긋한 내음을 풍기고 있다.
빠른 애들은 사춘기 때에 벌써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슬퍼하고, 낙엽 태우는 냄새를 맡으며 시를 쓰곤한다는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그게 뭐여..." 하면서 희롱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요즘, 이제 곧 사춘기를 맞을 아들놈이 있는 이 나이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가끔 "인생"이라는 거창한 주제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있다.
물론, 낙엽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저런 상황에 위치해 있는 내게, 저 낙엽들이 한번 더 인생에 대해 진지해 보게 기회를 주는 것일게다. 어디선가 나무가 잎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잎이 나무를 위해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괜히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서 (평소에는 머리 속에 담고 있는지 생각도 못하다가) 그런 말도 괜히 떠올리게 되고, 그러면서 또 다시 "쎈치"해지고 "멜랑꼴리"해 지기도 한다.
<낙엽을 긁고 주워 담으면 손과 몸에 향긋한 가을 냄새가 가득 밴다.>
<올해 우리 가든의 효자는 단연 "깻잎"이었다.
다른 품종에 비해 주인의 손길을 제일 적게 닿고도 가장 품질 좋은 것들을, 가장 많이 생산해 내었다.>
<특이한 수확의 기쁨을 준 오이도 가을 기해 작별을 하고 있다.>
<낙엽을 긁다가 "아, 이 가을도 남겨보자"는 생각으로 카메라를 들고 나와 집 주위를 찍어 봤다.
어느분 말씀대로 단풍을 구경하려고 멀리 나갈 필요가 없다.
파랑새는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집 뜰에 있었다는 것처럼,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풍경이 바로 내 집 앞뒤와 내 동네에 자리하고 있다.>
#2
특별한 일이 없는 일요일의 일과는 아내와 애들을 데리고 교회에 다녀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가서 (솔직히 아직도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예배당 의자에 앉아 내겐 무척 "심도있는, 어려운" 말씀에 귀기울리려 노력하고, 점심을 먹고 돌아 온다. 그러고는 인터넷을 통해 한국 텔레비젼의 오락 프로그램 하나를 시청하는 것이 일요일의 "낙" 중 하나가 된 지 꽤 되었다. KBS에서 하는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이다. 몇달 전에 우연히 보게 되어, 그 후로 일요일에는 빠지지 않고 본 것 같다.
나도 처음 이곳에 와서 여기서 살고 계신 분들이 우리나라 텔레비젼 프로그램을 보신다고 하면, "무슨 딴 나라에 가서까지 한국 텔레비젼을 보고 그러나..."하고 의아해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 프로그램은 미국의 그것이 주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 예전에 가요무대나 전국 노래자랑 사회자께서 프로그램 시작할 때면 항상, "그리고 해외에 계신 동포 여러분" 하면서 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에 대해서도 항상 인사하는 것을 들었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아니 외국에 나가서까지 (내게는) '재미없는' 가요무대를 보는 사람들이 있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외국 땅에서 시청하기에 가장 "짠하고 눈물나는" 프로그램이 바로 그런 가요프로그램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내가 그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다른 사람들이 그러할 듯이, 출연자들이 중년의 나이에 뭔가 도전하고 성취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를 통해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거나, 직접 도전하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도배를 하고, 밴드를 하고, 합창을 하는 등, 보통 사람들 누구나 하고는 싶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도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아, 나도 해 볼까?" 하는 자극이 되는 것이다.
오늘 프로그램은 "초심"에 관한 것이었다. 나도 이곳에 와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자꾸 자꾸 되뇌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이 "오락" 프로그램에서도, 출연자들의 각 분야에서 마다 원래 했던 자리에 인위적으로 보내서 뭔가 임무를 수행하도록 한 것이었는데, 출연자 누군가의 말대로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의도치 않게" 당사자들이나 보는 사람들을 슬프게 만들었다.
정말 "광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으로 "심하게" 분장을 하고, 관중 앞에서 온갖 우스꽝 모습과 동작과 말들로 웃긴 후에, 무대 뒤로 와서 슬퍼하는 그들을 보면서 가슴을 찡했던 것은 나만 그런 것은 아닐듯 싶다. 그건, 그들이 슬퍼하는 것이 슬퍼서가 아니라, 나와 나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때문이 아니었을까. 현재 최고의 개그맨 중의 한명이라고 할 수 있는 50대의 출연자가, 코메디를 마치고 나오는 복대에서 성원을 하는 많은 후배들을 보니, 열댓명의 자기가 서 있는 것 같았다는 말은 정말 가슴에 와 닿았다. 아... 자꾸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정말 나이가 들어가는 것인가!
#3
엊그제, 최근에 이 나라로 공부하러 큰 결심을 한 후배와 전화 통화하면서, 나도 비슷하게 다시 한번 "초심"을 생각해 봤었다.
그 후배는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서 공부하고 있어 정확히는 알수 없지만, 내가 첫 학기에 경험했던 그 많은 어려움을 지금 겪고 있는듯 했다. 자격도 되지 않으면서, 그래도 비슷한 경험을 먼저 했다고, 내가 후배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해 주면서, 한편으로는 "아,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스 관리 잘 해라, 그래도 너를 부러워 하는 애들이 있으니 감사하면서 공부해라, 그런 과정 누구나 겪으니 지나면 좋아 질꺼다" 등등의 말을 했던 것 같은데, 후배에게 해 주는 그 조언대로 나는 살고 있는지 문뜩 돌아 보게 되었다.
첫 학기 때는 정말 모든 것이 버겁고 적응하기 쉽지 않는데, 그런 와중에도 얼마나 감사한 생각들이 많았던가. 아침에 학교에 가서 저녁 8시가 넘어서 집에 와서, 다시 저녁 먹고 수십, 수백 페이지의 책을 (잘 이해가 안되면서도) 밑줄 그어야 했던 그때는 이렇게 와서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웠던가. 그렇게 맥주를 좋아하는 내가 첫 학기에는 정말이지 아주 특별한 날이 되어서야, 그것도 한달에 한번 혹은 두번 정도 밖에는 입에 술을 대지 않는, 정말 대단한 금욕의 생활을 했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엊그제 후배와 전화 통화하면서, 그리고 오늘 인터넷으로 오락 프로그램을 보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봤다. 나의 생활에 좀 배부른 부분은 없는지, 나의 뇌속에서 "감사(고마움)" 기능을 담당하는 부서가 최근 너무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연구를 하면서 예전보다 밑줄 그었던 길이가 짧아지고 책장에 묻히는 침의 양이 줄어들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봤다.
#4
나는 나이로 남을 "공격"하는 농담을 자주 했었다. 물론 나 스스로는 악의 없이 하는 농담이라면서 한 말들이었지만, 같은 직장 동료들과 우스개 소리를 할 때도 "에이.. 나는 40대랑 안놀아" 하면서 연령 차별적인 발언을 쉽게 했었고, 형과 누나에게도 "이젠 40대여..." 하면서 나이 들어가는 남의 모습을 희화화 했었다.
하지만, 그런 농담을 하고 몇년이 지난 내가 이제 그 나이대로 진입하고 있다. (나도 40대가 된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었지??) 내 또래의 많은 다른 사람들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안정되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불안정하게 진행형이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아내나 애들에게 무척 미안하고, 그러면서 스스로가 작아 지는 느낌을 갖을 때가 가끔 있다.
아주 심하게는 (자주 하는 생각은 아니지만) "내가 지금 뭐하는 것인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러고 있지?" 하면서 나의 "욕심" 때문에 애들과 아내가 겪어야 하는 여러 불편이 미안하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 또한 분명 내가 초심을 많이 잊었음을 보여주는 것들일 것이다. 후배에게 했던 그 모든 조언들은 사실 내가 내 스스로에게 하면서 되새기고 되새겨야 할 것들이다.
벌써 20년 가까이 된다고 할 정도로 나이가 들었지만, 정말 성인으로서 내 스스로의 삶을 살기 시작한 때였다고 말할 수 있을 대학시절. 그때 내가 꿈꾸던 것들은 무엇이었던가. 그때 내가 열심히 영어사전 뒤졌던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다소 계획보다 늦었기는 했지만,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바로 이 모습이 내가 그때 꿈꾸던 모습이 아니었던가!
나무를 버리고 낙하하는 잎들을 보면서, 그리고 떨어져 바닥에 뒹구는 낙엽들을 보면서 삶이 다시 진지해지는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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