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빈이 사는 법

"Her Spirit"

남궁Namgung 2018. 5. 23. 05:51

내가 다니는 학교가 아이들 보다 방학을 2주 정도 일찍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5시 50분에 일어나 준비하고 유빈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는 일이 쉽지 않다. 다만 유빈이와 혜빈이를 학교에 내려 주면 반나절 정도의 내 편한 시간이 있기에 전보다 훨씬 더 여유롭게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도 얼마 남지 않았다. 며칠 후면 애들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길고 긴 방학을 온 식구들이 집에서 옹기종기 모여 보내는 생활을 시작할 것이다.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올해도 한 학년을 마치는 이 즈음에 아이들 학교에서 여러 행사가 있었다. 혜빈이도 얼마 전에 시작한 배구 경기가 몇차례 있었고, (나는 다른 일로 참석을 못했지만) 밴드 연주회가 있어 그동안 연습한 클라리넷을 다른 친구들과 함께 발표하는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여러 행사 중 가장 "굵직한" 것은 바로 유빈이네 학교에서 있었던 영화제(Film Festival)였다. 


지금 유빈이가 속해 있는 과가 영화과(Video Cinema Art)인데, 물론 다른 과목과 함께 영화와 관련된 이론과 실기 수업이 있다. 작년에도 영화제가 있어서 와 보았었지만, 이 과의 중학생들에게 요구되는 과제가 (적어도 나에게는) 그리 흥미로운 것들은 아니어서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예를 들어, 작년 중학생들은 찰흙으로 만든 형상이나 장난감 등을 이용해서 아주 단순한 (약 3-4분 정도) 애니매이션을 만드는 것이었었다. 여러 학생들이 팀을 이루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촬영한 후 발표했는데, "영화제"라는 이름 보다는 그저 과제 발표회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할 정도로 솔직히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고등학교 저학년부터의 작품들은 대개 스토리가 있었고, 뮤직비디오로 발표하는 학생들은 음악과 함께 어우러진 영상들이 꽤 볼만한 것들이 있었다. 그래서 작년에 영화제를 보고 나오면서 "그래도 내년에는 저 정도는 해 내겠지..." 하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지난 12월. 


유빈이는 가을학기를 마치면서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저희 학년 (9학년) 영화과에서 영화감독으로 역할을 맡아 프로젝트를 책임질 학생 중 자신의 프로포절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몇몇 작품 중에 제 것도 선정이 되었다며 무척 흥분한 상태로 집에 온 일이 있었다. 


유빈이의 말에 따르면,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알게 된 일본의 영화감독 구로사와의 작품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제에 발표하게 되는 큰 주제, 즉 애니매이션, 뮤직비디오, 거장 작품의 오마주 중 마지막으로 방향을 작품 그의 작품을 흉내내는 계획을 발표했고, 학생들의 투표로 결정되는 이 과정에서 자기의 프로젝트가 선정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지난 겨울 방학부터 의상과 배우 섭외 등을 부지런히 시작해야 한다며 첫 "영화감독"으로서의 데뷔작 준비를 시작했다. 


그 프로젝트의 내용을 들으면서, 준비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과연 그러했다. 


일단 이 나라에서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일본 영화를 흉내내려면 동양인 배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쉬울까 싶은 걱정이 제일 먼저 들었고, 사무라이가 입는 복장이나 무기(칼) 등을 어떻게 구할 것인지도 큰 숙제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 사람이 등장하는 "일반" 영화에 비해서 준비하는 과정에 여러 난관이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배우 고용사이트에서 우연히 알게 된 동양인 무술감독을 알게 되었고, 그의 도움이 큰 역할이 된 것 같다. 덴버의 변두리 지역에서 무술도장을 하는 게리라고 하는 친구인데, 작은 영화에도 출연을 한 경혐이 있는지 이 분야의 촬영 과정 등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사무라이가 쓰는 칼이나 기모노 등을 구입할 수 있는 방법 등에 대해서도 조언을 해 주었다. (유빈이가 이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다른 사람을 만날 때마다 거의 대부분 함께 했었기에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리고, 게리는 자신의 도장에서 무술 연습을 하는 동양인 친구들에게 물어 봐서 영화에 출연할 의사가 있는지 물어 봐 줄수 있다고 했고, 미국인이지만 약간 동양적인 분위기가 나는 여자 연습생도 그를 통해 구하게 되었다. 


영화에서 사무라이가 쓸 칼도 이베이를 찾아 보니 판매하는 곳이 있었고, 사무라이가 입어야 할 옷도 역시 이베이를 통해 구입했다. 다른 배우들이 입을 옷들은 중고점에 들러 제일 저렴한 것으로 사서 영화 제작에 어느 정도 구색을 맞출 정도의 준비를 마쳤다. 


영화는 유빈이가 직접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는데, 세 곳의 공원을 오가며 2-3월의 추운 날에도 불구하고 여러 배우와 유빈이의 친구들이 함께 제작에 참여해서 큰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유빈이 친한 친구 중 이번 프로젝트에 촬영 등 여러 업무를 담당한 그랜트라는 친구가 마지막 편집 등을 해서 약 10분짜리의 영화가 완성이 되었다. 



<학교 과제물로 작성한 대본. 내 역할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더니 2분도 되지 않는 "작은 역할" 임에도 그것을 외우고 배우 흉내 내는 것이 내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출연하기로 동의한 무술관 학생들이 다행이 아주 협조적이어서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 모두 무료로 이 영화에 참여해 주었는데, 특히나 영화에는 잘 나오지 않았지만 무척 추운 날 얇은 옷을 입고 하느라 이 친구들의 고생들이 많았다.>



<영화는 콜로라도의 주립 공원 세곳에서 진행했다. 집에서 모두 30분에서 1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곳들인데, 덴버를 중심으로 이쪽 저쪽에 흝어져 있어서 오가는 길이 짧은 편이 아니었다. 다행 배우들과 제작진들이 모두 잘 협조해 주어서 큰 이슈없이 진행되었다.>



<영화가 올려져 있는 유뷰브 링크를 옮기고 싶지만 나의 연기가 너무 형편없어 그를 올리지 않고 대신 화면을 캡쳐했다. 물론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겠지만... 마지막 등장인물 이름이 올라갈 때 내 이름도 포함되어 있다. 아... 나도 할리우드 진출해야 하는건가... ㅎㅎ>





영화제에 출품하는 학생들은 적어도 한달 전 정도에 초안을 제출하도록 한 모양인데, 이전부터 나와 아내가 그렇게 보여달라고 해도 계속 진행 중이라면서 보여주지를 않았다. 나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아내가 유튜브를 우연히 검색하다가 편집을 담당한 유빈이의 친구가 올려 놓은 영상을 찾아 냈다. 그래서 유빈이에게는 모른채 하며 그간의 작품이 수정, 보완되는 과정을 모두 살펴 볼 수 있었다. 


물론 전문가들의 작품에 비해서 여러가지 아쉬운 점들이 눈에 쉽게 띄었지만, 이런 작품을 처음 제작하는 고등학교 1학년 (혹은 9학년) 학생들의 작품임을 감안하면 아주 훌륭하다고 평가했던 것은 내가 부모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에 나오는 모든 촬영 장소와 소품이 내게도 익숙하고 친숙하기가지 한 것이어서 나도 이 작품에 정이 가기 시작했다. 


그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는 나도 배우로 출연을 했다! 유빈이가 쓴 시나리오 상의 주인공인 젊은 사무라이 아버지 역할을 내가 한 것이다. 처음부터 60대 정도의 동양인을 찾으려고 했었는데, 아마추어 배우로서 그 나이 또래의 동양인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였다. 유빈이는 내게 교회의 연로한 분들이나 내 친구 중에서 부탁해서 하루만 촬영에 협조해 달라고 하는데, 그 일을 남에게 부탁할 수 없었고, 그래서 대안으로 생각해 낸 것이 내가 직접 "열연(?)" 하는 것이었다. 


영어로 제작된 이 영화에서 다른 모든 배우들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영어로 말하는데, 나만 유독 특이한 액센트로 말한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흠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도 출연하고, 중간에 출연하기로 했던 배우가 나타나지 않아 유빈이도 출연하는 과정을 거처 (아내 말로는 "가내수공업") 영화가 완성된 것이다. 




2주 전 목요일에 이 영화와 다른 것들을 발표하는 영화제가 유빈이네 학교 강당에서 있었다. (2018. 5. 10.)


이전가 마찬가지로 중학생들과 9, 10학년 학생들의 작품 발표가 있었는데 유빈이의 영화도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시간이었다. 순서지를 보니 제일 마지막에 들어가 있었다. 이미 (유빈이 몰래) 작품을 본 나와 아내는 과연 다른 고등학생들의 작품과 비교해서 그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평가도 큰 관심 중의 하나였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중학생들은 애니매이션을 만드는 것이었고, 중간 휴식 시간 이후 계속된 후반부에는 고등학생들의 작품이 있었다. 역시 작년과 같이 뮤직 비디오나 다른 감독의 오마주 작품들이었는데 물론 고등학생들의 작품들은 확연히 나아 보였고 물론 자연적인 현상일 수 있겠다. 


내가 부모이니 약간 편견이 있겠지만 유빈이의 작품이 상영되고 나서의 반응은 다른 작품들의 것과는 달리 다소 "뜨거웠다." 내가 보아도 편집 기술이 다른 것보다 나아 보였고, 10분 짜리의 짧은 작품에서 스토리도 전달하고 있어서 뭔가를 봤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내 얼굴도 커다란 스크린에 비치는 "데뷔"를 하면서 낯뜨거운 시간도 있었지만 그 날 강당에 있었던 학생과 부모들의 반응이 좋아 내심 기분이 좋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영화제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투표지를 주면서 (중학생, 고등학생 중의 것들 중) 좋아하는 작품을 뽑도록 했는데, 물론 나와 아내는 유빈이의 작품에 동그라미를 치고 나오면서 다른 참가자들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여느 부모의 마음으로 집에 돌아 왔다. 




지난 주 수요일에는 학교 과에서 지난 학기를 정리하면서 여러 방면에서 우수한 학생들에게 시상을 하는 "에디 어워드 (Eddie Award)"라는 행사가 있었다. 영화과에서 오래 근무한 노교사의 이름을 딴 시상식으로 알고 있는데, 고등학교 학생들은 모두 참석해야 한다며 방과 후에 그 행사에 참여하고 오겠다고 했다. 


시상식이라고 하니, 이 전의 영화제에서 투표한 결과도 발표할 것 같았고, 그렇다면 유빈이 작품도 어느 분야든 선정이 될 수 있을 듯 싶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대개 학생들이 수상을 하게 되면 부모들에게 연락하는 것이 대개 학교의 관례임에도 유빈이의 작품이 상을 받는다는 연락이 없기에 다른 학생들의 작품이 선정된 것으로 짐작했었다. 


그런데, 이 행사를 마치고 돌아 온 유빈이가 큰 상 두개를 가져와서 내 놓았다. 학교에서 선정한 감독상과 관객이 뽑은 상 두개였다. 시상식을 직접 참여하지 않았고, 유빈이도 구체적인 얘기를 하지 않아 얼마나 많은 학생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이 수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간의 고생에 대한 값진 보상을 유빈이가 받게 되어 무척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던 것은 더할 나위 없었다. 


<학교에서 받아 온 트로피와 증서. 증서는 "올해의 감독"을 말해 주고 있는 작은 트로피에는 영화제 당일 투표에서 관객들이 뽑은 영화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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