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ce News
출산, 그 위대한 과정의 옆에서...
남궁Namgung
2003. 1. 3. 04:15
어린이가 잠을 잔다. 내 무릎 앞에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다. 볕좋은 첫여름 조용한 오후이다.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 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 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아니 그래도 나는 이 고요한 자는 얼굴을 잘 말하지 못하였다. 이 세상의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은 모두 이 얼굴에서 우러나는 듯싶게 어린이의 잠자는 얼굴은 고요하고 평화스럽다. '어린이 예찬' -방정환- 중에서
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이제 수십년을 저와 아버지, 자식의 관계로 살아 갈 제 아들이 지난 2002년 12월 30일 오전 6시 38분에 태어났습니다. 지금 아기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어떤 숨소리를 내면서 자고 있는지 코와 입에 제 귀를 아주 가까이 대어도 그 숨소리가 너무 작고 가는 것이 정말 위 방정환 선생님의 '어린이 예찬'이라는 글을 저절로 생각나게 했습니다.
오늘은 제 아들이 태어나기까지 여기서 겪은 일, 특히 출산시 병원에서 겪은 일을 바탕으로 왜 이 나라가 '선진국'이라 칭해지고 있고,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지 제가 느낀 바를 중심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지난 2002년 7월 말에 이곳 영국(잉글랜드)으로 올 당시, 아내는 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출국 일정이 갑작스레 바뀌어 이사며 직장 등 정리해야 할 것은 많아 바쁘게 지냈던 날들이었습니다.
저는 우선 제가 여기에 도착해서 살 집이며, 자동차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여건을 갖추어 놓은 후 아내가 뒤따라 왔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임시로 약 2개월간 머물 수 있는 기숙사가 정해져 있었지만 그 시설이 어느정도인지 알 수 없었고, 아무래도 무거워지고 있는 몸으로 함께 다니며 준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때문이었죠. 하지만 아내는 '남편과 함께라면...' 이라는 마음으로 함께 출국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고, 저도 더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도착해서 2개월 가량 살았던 기숙사는 더블침대, 세면기 1개, 책상 2개만 덜렁 있는 방 하나짜리였고, 화장실과 욕실은 다른 학생들과 같이 사용해야 했던 곳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천장에 썰렁하게 붙어 있는 100촉짜리 전구가 방을 더 초라하게 만드는, 그런 기숙사였습니다.
학교에는 International Office라 하여, 외국인 학생들의 업무나 학교 생활 등에 대한 조언을 해 주는 사무실이 있었는데, 그곳에 들를 일이 있어 갔다가 그곳 담당자에게 아내의 임신 사실을 말하니 학교 병원(Student Health Centre)에 등록을 하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라며 하루라도 빨리 병원에 같이 등록을 하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영국에는 GP(General Practitioner)제도라 해서 거주지에서 가까운 병원을 지정해 그곳 병원을 이용케 하는 제도가 있고, 저는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기 때문에 학교 병원에 등록을 하면 되는 것이었죠. 그 며칠 후 아내와 함께 병원을 가서 등록을 했고, 병원에서는 아내를 도와 줄 조산원(midwife, 아래부터는 미드와이프라 하겠습니다)이 지정되어 도와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병원을 방문했을 때, 우리를 도와 줄 미드와이프와 서로 인사를 하고 혈압 검사 등 몇몇 검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미드와이프에 의하면 임신 약 30주경까지는 한 달에 한 번 미드와이프와 만나 검사를 하고, 그로부터 그 후 약 38주 경(임신 약 9개월)까지는 2주에 한 번 만나며, 그 후 출산시까지는 매주 한번씩 만나 검사를 하고 상담을 한다고 했었습니다.
병원에서 한 번 미드와이프와 만난 후, 그 미드와이프는 위 사진에 보시는 그 기숙사를 방문하기도 해서, 흡연 여부, 남편으로부터의 폭행 여부(?) 등등에 대해서 조사도 하고, 다른 궁금증에 대해 답변을 해주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후 그 미드와이프가 다른 직책을 맡았다고 해서 다른 미드와이프로 교체가 되었고, 현재까지 바뀐 미드와이프 케이트(Kate)가 아내와 아기를 살펴 주고 있습니다. 임신 마지막 달 경에 케이트는 임산부와 배우자가 출산을 하게 될 병원((Royal Devon and Exeter Healthcare)을 방문(tour)하는 기회가 있으니 병원에 가보라고 권했습니다. 매주 목요일 밤 8시에 있다고 해서 저는 12월 일 경에 장모님과 아내를 데리고 병원에 갔었습니다.
저희가 갔던 날에는 저희 외에 다른 세 커플들이 있었고, 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던 나이 꽤 많이 들어 보이는 미드와이프가 병원 곳곳을 데리고 다니며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특히 산모가 출산을 하게 될 분만실에서 여러 가지 장비들과 물품들을 보여 주며 상세히 설명해 주고, 질문에 답변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미리 병원에 가서 눈을 익혀 둔 것이 출산 직전 급한 마음에 병원을 갔을때 그나마 심적으로 안심시켜 준 한 요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출산 예정일은 12월 17일이었지만 아무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12월 18일 병원에서 만난 케이트는 초산일 경우 1주일에서 10일 정도는 늦어 지는 것이 보통이라며 안심시켜주면서, 만약 일주일 내로도 소식이 없을 경우 제가 살고 있는 집으로 찾아 와 다시 상의를 한다고 했습니다.
역시 그 사이에도 소식이 없었고, 케이트는 12월 27일에 집으로 왔습니다. 예정일로부터 2주가 넘어서면 산모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의사와 유도분만(induction)에 대한 상의를 할 수 있으니 그 다음 주 월요일인 30일(아기를 낳은 날이되었죠)에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말 내에 나올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을 시켜 주더군요.
그리고는 그 날 밤을 지난 새벽부터 아내가 진통이 온다고 했습니다. 아내와 장모님은 밤잠을 설치셨고, 케이트와 병원을 방문했을때의 미드와이프가 '진통이 5분 간격으로 규칙적으로 올 때' 병원에 전화를 해서 근무하고 있는 미드와이프와 상의를 하라고 해서 한참을 집에서 참았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날 내내 진통이 계속 되었고, 아내는 그 정도가 좀 더 심해 진다고 해서 진통 시작한 지 정확히 하루가 되는 일요일 새벽 두시경에 병원에 전화를 했고, 와 보라고 해서 전에 꾸려 놓았던 짐을 모두 차에 싣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새벽에 근무를 하던 미드와이프가 전화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며 검사실로 데리고 갔고, 배에 벨트 두개를 둘러 아기의 상태와 수축(contraction)의 정도를 약 20분 정도 체크했습니다. 그런 후 자궁문(cervix)을 확인하더니 약 10센티정도까지 되어야 하나 약 2센티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상태이고, 분만실에 들어 가기 위해서는 최소 5센티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상태에서 그 정도까지 얼마의 시간이 되는지 물었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정확히는 알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통증이 심하다면 진통(pain relief)의 효과가 있는 약을 먹으라며 알약(tablet) 두개를 주었고, 그와 함께 등에 붙일 수 있는 손바닥만한 진통 기계도 붙여 주었습니다. TENS라고 하던데, 후에 책을 찾아 보니 Transcutaneous Electrical Nerve Stimulation의 줄임말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아래는 책자에 있던 것을 사진으로 찍어 올린 것입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 와 아내는 약을 먹고 허리에 붙인 그 기계에 통증 완화를 의지하며 다시 일요일을 어렵게 맞았습니다.
일요일에도 아내의 진통은 계속되었고, 그 간격이 짧아지고 강도는 더 세어진다고 했습니다. 오후 4시가 넘어서 다시 병원으로 전화를 했고, 병원에서는 다시 와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함께 병원으로 갔고, 근무하고 있던 또 다른 미드와이프가 전날 했던 같은 검사를 했습니다.
그 미드와이프는 전날의 미드와이프와 같은 말을 하며 집에서 있다가 좀 더 진척이 되면 올 것을 권하다가 다른 미드와이프나 의사와 상의를 했는지, 스캔을 한 번 해 볼 것을 권했습니다. 그런 후에, 어느 정도 단계가 되었으니 입원을 한 후, 자궁문이 7센티 정도 단계에 되면 분만실로 옮기자고 했습니다. (오후 8시경)
밤 10시경에 다른 미드와이프가 다시 와서 검사를 하고는 진행이 빨리 되어 자궁문이 7센티 정도 열렸으니 분만실에 내려가도 좋다고 해서 저와 장모님, 그리고 아내가 분만실(delivery room)에 내려 갔습니다.
저희 아기를 받아 줄 미드와이프라며 또 다른 여자, 안나벨(Annabel)이 와서 인사를 했습니다. 제 아내는 전부터 수중 분만을 원해서 안나벨에게 말을 했고, 안나벨은 욕조에 물을 받고 몇번씩 물 온도를 체크한 후에 아내가 들어 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가장 적당한 온도는 36도정도라고 하더군요.)

아내의 진통은 계속 되었고, 물속에 있던 아내는 배에서 계속 힘이 주어진다며 물 밖으로 나올 것을 원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고도 진통은 계속 되었지만 확인해 본 안나벨은 아직 단계가 되지 않았고, 아기의 머리가 약간 비틀려 있으니 분만실 내를 약간 걸을 것을 권했습니다. 그리고도 진통이 계속 되었고, 아내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침대에 기대자 안나벨은 매트를 가져다 준다며 매트와 공을 가져왔습니다. (위 사진에 보이는 공이 바로 그 때 사용한 공입니다.)
매트 위에서 아내는 계속 진통을 했지만 생각대로 진척이 되지 않았고, 안나벨도 머리를 좌우로 저으며 아직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러기를 상당 시간 보내고 아내가 너무 어려워하고 통증을 호소하자 안나벨은 의사와 상의를 해서 다른 방법을 시도해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새벽 4시경). 잠시 후 남자 의사가 들어 왔고, 수축의 힘을 더 줄 수 있게 하는 링거(drip)를 놓아 준다며, 만약 그것도 되지 않을 경우 겸자분만(suction)의 방법을 사용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제 아내는 더 이상 힘을 줄 수 있는 자신이 없다며 제발 겸자분만으로 하자고 호소를 했고, 중간에서 그 말을 옮겨 주어야 하는 저도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곁에 계시던 장모님은 딸의 안쓰러운 모습에 눈물까지 보이셨습니다. (나중에 하시는 말씀으로는 미리 우황청심환까지 드시고 오셨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하기를 두어시간...
이런 것을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요.
링거를 맞기 위해 매트에서 침대로 올라 온 후 채 5분도 되지 않아 자신감을 잃고 낙심해 하던 아내가 계속 힘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앞에서 지켜 보던 안나벨도 놀랍다(brilliant)고 소리치며 아내를 격려했고, 그러기를 2-30분 후에 아기가 나왔습니다.
아내도 감격스러워 눈물을 글썽였고, 저도 옆에서 지켜 보고 있노라도 눈물이 핑 돌더군요. 아무튼, 제게는 아내의 출산을 바로 옆에서 지켜 볼 수 있는 아주 큰 행운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지켜 보았다기 보다는 아내에게 품이 끌려 거의 끌어 안고 격려를 하고 있었죠...^^)
아래는 곁에서 8시간 넘게 지켜 보며 도와 주었던 미드와이프인 안나벨입니다.

안나벨이 우리 아기의 무게를 재고 있습니다. 정확한 몸무게는 3359그램이고, 머리둘레(head circumference)는 34센티미터, 키(length)는 52센티미터입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위해 쓴 사실관계가 너무 길어졌습니다만, 정말이지 제 아내가 제 아들을 출산하는 그 현장에서 함께 안타까움과 고통을 한다는 것은 아내에게도 큰 위안이 되었고, 제 자신에게도 큰 추억이 될 것이고 행운이었습니다.
제가 위의 과정을 겪으면서 느낀 점을 몇가지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저는 그간 생활한 여기에서의 5개월여 동안 '도대체 영국이 뭐냐?'라는 생각을 항상 했었습니다. 한때 전세계의 몇분의 일을 식민지로 갖고 있었고, 아직도 commonwealth라는 연합체에서 중심적인 나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G7의 한 국가이고, OECD의 멤버국가라고 하지만, 이제는 미국에 밀려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고는 자신있게 말하기가 주저하게 되고, 유럽 내에서도 그 위상이 그리 크게 서 있지는 않는 것 같은, 누구의 표현대로 '석양에 지는 해를 바라 보는 노신사' 같은 나라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나라가 IT산업에서 눈부신 성장을 거두어 인터넷과 핸드폰이면 거의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경지에 와 있는 반면, 이 나라에서는 아직도 56k 모뎀 사용자가 다수이고, 그 나마 인터넷을 이용하는 인구가 많지도 않으며, 핸드폰을 이용 기술은 우리의 4-5년 전 수준에 밖에 있지 않는 나라...
거리에서도 함부로 무단횡단을 하거나, 담배꽁초를 버리고, 고속도로에서의 과속은 가히 가공할 만하며, 범죄율이 높아 정부에 대한 비판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고, 교사, 소방관 등의 파업문제가 끊이지 않는 나라. '영국 신사'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백인 우월의식을 갖고 소수인종(minority)에 대한 은근한 경멸감...
한때는 '내가 이 나라에 뭘 배우러 왔나' 하는 생각까지 가졌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에 아내의 출산과정을 통해 여러 미드와이프의 근무 태도와 자세, 이 나라의 정책을 보면서 그러한 생각이 거의 바뀌었습니다.
우선 임산부들에 대한 정책입니다. 저도 정확한 지식이 없어 자세하게는 설명드릴 수 없으나, 영국의 의료체계는 국가관리체제입니다. NHS(National Health Service)라는 이름이 나타내듯이 국가에서 건강에 대한 서비스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의료관련 비용은 무료거나 상당히 저렴합니다. 물론 나라에서 관리하다 보니 그에 따른 문제점이 많아 지금도 계속 정치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고는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의료서비스, 특히 임산부에 대한 고려를 생각해 본다면 이들이 약자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내를 맡았던 또 다른 미드와이프는 국가관리체제로 인해 지역마다 불균형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인이 되고, 자기들에 대한 임금도 만족스럽지 못하다며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서비스의 수혜자인 이 나라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그 얼마나 세심한 배려인지 모릅니다. 임신 10개월 내내 계속 방문하고, 만나서 상담해 주는 것이 저와 제 아내에게만 감동스러운 서비스였는지...
금전적인 문제 또한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데, 제가 위에서 설명드린 그 모든 과정이 무료였습니다. 거기에 더불어 출산 후 1년까지는 산모와 아기의 제반 의료비용을 감면해 주는 카드도 발급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르면 여러분들께서도 '야...'하지 않으실까 생각됩니다만...
둘째로, 미드와이프들의 자세입니다. 그들은 제가 피해의식과 같이 가졌던 생각, '너희들은 열등한 유색인종일 뿐이야...'라는 생각을 속으로 할지도 모릅니다. 겉으로는 웃고 친절한 척해도 속으로는 '나는 너희들보다 훨씬 우월한 백인이야...'라는 생각을 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그들과 만나 대화하고 그들의 서비스를 받으면서 그런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친절해서 위와 같은 생각이 도저히 나지 않을 뿐더러, 친절도에서만 비교하면 그들은 '우월하다'는 평가를 받을만 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언젠가 읽은 이어령 선생님의 글 중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정'과 '친절' 등에 대한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일본의 친절이 아무런 감정없이 '기계적'인 반면, 우리의 친절은 겉으로는 무뚝뚝하지만 속으로는 정감있고, 끈적하다는 요지의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직 일본인의 친절은 경험해 보지 않아서 그 분의 글에 대한 제 의견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영국인 아니 좁게 말해 미드와이프들의 친절은 그것이 기계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기계적인 것은 얼마든지 배우고 익혀야 겠다는 생각을 절로 갖게 합니다.
제 아내가 아기를 낳은 병원의 시설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닙니다. 국가 관리체제에서 나온 문제 중의 하나이기도 하겠지만 시설에 대한 투자가 그리 활발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아래 제 아내가 있던 병실의 시설을 대충 둘러 보시면 어느 정도 추측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대개 산부인과들이 각종 최신 장비를 동원해 매 방문시마다 스캔 해 주고, 아기의 모습을 3차원으로 보여주고, 그 모습들을 비디오에 담아 주고, 또 각종 검사다 뭐다 해 주고 있습니다만, 위 병실과 같이 여기의 시설은 대부분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방식이고, 외관상으로는 꽤 오래되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하드웨어는 미비해 있더라도, 모든 미드와이프의 친절과 같은 소프트웨어가 철저히 되어 있는한 그들의 발전 가능성은 무한하며 언제든지 재도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모에게 미드와이프가 주는 아래와 같은 책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의 모든 내용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서점에서 판매하는 출산, 육아책자보다는 훨씬 얇아도 내용은 충실하게 되어 있고, 또한 무료입니다. (총 145페이지, 볼펜은 책자의 크기를 위해서 일부러 올려 놓았습니다.)
이곳의 제왕절개 수술율은 약 20%정도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여성과 이곳 여성과의 신체적 차이는 인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40%가 넘는다고 하는 우리나라의 제왕절개 수술율은 우리의 후진적 사고와 의료체제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여기서는 배우자며 보호자가 당연히 분만실로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실은 저와 장모님에게는 들어 가려냐고 묻지도 않더군요), 제가 들어가서 경험한 바로는 보호자가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도 배워야 할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에는 보호자를 입회하게 하는 병원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만...)

위와 같은 느낌 외에 개인적인 것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대부분의 여성이 갖는 '출산의 고통'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왜 어머니가 위대한 것인지를 느꼈습니다. 중학교 수업시간에 사춘기 어린 제게는 '성적인 농담'의 재료가 되었던 '정자와 난자' 만남, 그리고 그로부터 자궁에서의 성장과 출산... 이런 과정을 왜 '성스럽다'고 하는지 비로서 알게 되었습니다.
또 부수적이고 사소한 것이지만 제게는 많은 영어 공부의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contraction(수축), cervix(자궁문), placenta(태반), womb(자궁), cord(탯줄), open the vowel(똥누다) 등등...
이런 기회가 아니면 제가 사용할 일이 거의 없는 영어를 배우고 사용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또 여러 영국인들과 대화를 함으로 인해 잘 하지도 못하는 영어를 갈고 닦는 기회도 되었죠.
머나먼 타국에 와서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자기의 답답한 마음이나 고통을 직접 말하지도 못하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남편 하나만 믿고 건강한 아들을 낳고, 건강하게 지내주고 있는 아내에게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몇년 안되는 동안 많은 모습을 지켜 보아 왔지만 엊그제 출산 과정을 통해 보여준 제 아내의 모습은 정말 '위대하다'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여기 오셔서 아기와 아내를 위해서 늙으신 후에도 힘든 고생을 하고 계신 장모님도 항상 그랬듯이 감사합니다. 어려우시면서도 어려운 내색을 하지 않으시고, 호강만을 받으셔도 모자란 세월에 저렇게 희생하시는 장모님... 저는 그러한 부모가 될 수 있을지...

지금 애기는 엄마 젖을 먹고 또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습니다.

저도 저렇게 평안하고 순수한 모습을 가진 때가 있었나 싶기도 하고, 그런 반면에 내가 저 만한때, 특히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어려웠을때 나를 낳고 키우시느라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몸으로 직접 느끼니 그간의 불효가 죄스럽기도 합니다.
아들도 제대로 키우고, 아들 노릇도 제대로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 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 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아니 그래도 나는 이 고요한 자는 얼굴을 잘 말하지 못하였다. 이 세상의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은 모두 이 얼굴에서 우러나는 듯싶게 어린이의 잠자는 얼굴은 고요하고 평화스럽다. '어린이 예찬' -방정환- 중에서
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이제 수십년을 저와 아버지, 자식의 관계로 살아 갈 제 아들이 지난 2002년 12월 30일 오전 6시 38분에 태어났습니다. 지금 아기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습니다. 어떤 숨소리를 내면서 자고 있는지 코와 입에 제 귀를 아주 가까이 대어도 그 숨소리가 너무 작고 가는 것이 정말 위 방정환 선생님의 '어린이 예찬'이라는 글을 저절로 생각나게 했습니다.
오늘은 제 아들이 태어나기까지 여기서 겪은 일, 특히 출산시 병원에서 겪은 일을 바탕으로 왜 이 나라가 '선진국'이라 칭해지고 있고,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지 제가 느낀 바를 중심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지난 2002년 7월 말에 이곳 영국(잉글랜드)으로 올 당시, 아내는 배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출국 일정이 갑작스레 바뀌어 이사며 직장 등 정리해야 할 것은 많아 바쁘게 지냈던 날들이었습니다.
저는 우선 제가 여기에 도착해서 살 집이며, 자동차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여건을 갖추어 놓은 후 아내가 뒤따라 왔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임시로 약 2개월간 머물 수 있는 기숙사가 정해져 있었지만 그 시설이 어느정도인지 알 수 없었고, 아무래도 무거워지고 있는 몸으로 함께 다니며 준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때문이었죠. 하지만 아내는 '남편과 함께라면...' 이라는 마음으로 함께 출국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고, 저도 더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도착해서 2개월 가량 살았던 기숙사는 더블침대, 세면기 1개, 책상 2개만 덜렁 있는 방 하나짜리였고, 화장실과 욕실은 다른 학생들과 같이 사용해야 했던 곳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천장에 썰렁하게 붙어 있는 100촉짜리 전구가 방을 더 초라하게 만드는, 그런 기숙사였습니다.
학교에는 International Office라 하여, 외국인 학생들의 업무나 학교 생활 등에 대한 조언을 해 주는 사무실이 있었는데, 그곳에 들를 일이 있어 갔다가 그곳 담당자에게 아내의 임신 사실을 말하니 학교 병원(Student Health Centre)에 등록을 하는 것이 가장 급한 일이라며 하루라도 빨리 병원에 같이 등록을 하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영국에는 GP(General Practitioner)제도라 해서 거주지에서 가까운 병원을 지정해 그곳 병원을 이용케 하는 제도가 있고, 저는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기 때문에 학교 병원에 등록을 하면 되는 것이었죠. 그 며칠 후 아내와 함께 병원을 가서 등록을 했고, 병원에서는 아내를 도와 줄 조산원(midwife, 아래부터는 미드와이프라 하겠습니다)이 지정되어 도와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병원을 방문했을 때, 우리를 도와 줄 미드와이프와 서로 인사를 하고 혈압 검사 등 몇몇 검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미드와이프에 의하면 임신 약 30주경까지는 한 달에 한 번 미드와이프와 만나 검사를 하고, 그로부터 그 후 약 38주 경(임신 약 9개월)까지는 2주에 한 번 만나며, 그 후 출산시까지는 매주 한번씩 만나 검사를 하고 상담을 한다고 했었습니다.
병원에서 한 번 미드와이프와 만난 후, 그 미드와이프는 위 사진에 보시는 그 기숙사를 방문하기도 해서, 흡연 여부, 남편으로부터의 폭행 여부(?) 등등에 대해서 조사도 하고, 다른 궁금증에 대해 답변을 해주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후 그 미드와이프가 다른 직책을 맡았다고 해서 다른 미드와이프로 교체가 되었고, 현재까지 바뀐 미드와이프 케이트(Kate)가 아내와 아기를 살펴 주고 있습니다. 임신 마지막 달 경에 케이트는 임산부와 배우자가 출산을 하게 될 병원((Royal Devon and Exeter Healthcare)을 방문(tour)하는 기회가 있으니 병원에 가보라고 권했습니다. 매주 목요일 밤 8시에 있다고 해서 저는 12월 일 경에 장모님과 아내를 데리고 병원에 갔었습니다.
저희가 갔던 날에는 저희 외에 다른 세 커플들이 있었고, 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던 나이 꽤 많이 들어 보이는 미드와이프가 병원 곳곳을 데리고 다니며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특히 산모가 출산을 하게 될 분만실에서 여러 가지 장비들과 물품들을 보여 주며 상세히 설명해 주고, 질문에 답변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미리 병원에 가서 눈을 익혀 둔 것이 출산 직전 급한 마음에 병원을 갔을때 그나마 심적으로 안심시켜 준 한 요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출산 예정일은 12월 17일이었지만 아무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12월 18일 병원에서 만난 케이트는 초산일 경우 1주일에서 10일 정도는 늦어 지는 것이 보통이라며 안심시켜주면서, 만약 일주일 내로도 소식이 없을 경우 제가 살고 있는 집으로 찾아 와 다시 상의를 한다고 했습니다.
역시 그 사이에도 소식이 없었고, 케이트는 12월 27일에 집으로 왔습니다. 예정일로부터 2주가 넘어서면 산모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의사와 유도분만(induction)에 대한 상의를 할 수 있으니 그 다음 주 월요일인 30일(아기를 낳은 날이되었죠)에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주말 내에 나올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을 시켜 주더군요.
그리고는 그 날 밤을 지난 새벽부터 아내가 진통이 온다고 했습니다. 아내와 장모님은 밤잠을 설치셨고, 케이트와 병원을 방문했을때의 미드와이프가 '진통이 5분 간격으로 규칙적으로 올 때' 병원에 전화를 해서 근무하고 있는 미드와이프와 상의를 하라고 해서 한참을 집에서 참았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날 내내 진통이 계속 되었고, 아내는 그 정도가 좀 더 심해 진다고 해서 진통 시작한 지 정확히 하루가 되는 일요일 새벽 두시경에 병원에 전화를 했고, 와 보라고 해서 전에 꾸려 놓았던 짐을 모두 차에 싣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새벽에 근무를 하던 미드와이프가 전화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다며 검사실로 데리고 갔고, 배에 벨트 두개를 둘러 아기의 상태와 수축(contraction)의 정도를 약 20분 정도 체크했습니다. 그런 후 자궁문(cervix)을 확인하더니 약 10센티정도까지 되어야 하나 약 2센티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상태이고, 분만실에 들어 가기 위해서는 최소 5센티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시 상태에서 그 정도까지 얼마의 시간이 되는지 물었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정확히는 알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통증이 심하다면 진통(pain relief)의 효과가 있는 약을 먹으라며 알약(tablet) 두개를 주었고, 그와 함께 등에 붙일 수 있는 손바닥만한 진통 기계도 붙여 주었습니다. TENS라고 하던데, 후에 책을 찾아 보니 Transcutaneous Electrical Nerve Stimulation의 줄임말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아래는 책자에 있던 것을 사진으로 찍어 올린 것입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 와 아내는 약을 먹고 허리에 붙인 그 기계에 통증 완화를 의지하며 다시 일요일을 어렵게 맞았습니다.
일요일에도 아내의 진통은 계속되었고, 그 간격이 짧아지고 강도는 더 세어진다고 했습니다. 오후 4시가 넘어서 다시 병원으로 전화를 했고, 병원에서는 다시 와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함께 병원으로 갔고, 근무하고 있던 또 다른 미드와이프가 전날 했던 같은 검사를 했습니다.
그 미드와이프는 전날의 미드와이프와 같은 말을 하며 집에서 있다가 좀 더 진척이 되면 올 것을 권하다가 다른 미드와이프나 의사와 상의를 했는지, 스캔을 한 번 해 볼 것을 권했습니다. 그런 후에, 어느 정도 단계가 되었으니 입원을 한 후, 자궁문이 7센티 정도 단계에 되면 분만실로 옮기자고 했습니다. (오후 8시경)
밤 10시경에 다른 미드와이프가 다시 와서 검사를 하고는 진행이 빨리 되어 자궁문이 7센티 정도 열렸으니 분만실에 내려가도 좋다고 해서 저와 장모님, 그리고 아내가 분만실(delivery room)에 내려 갔습니다.
저희 아기를 받아 줄 미드와이프라며 또 다른 여자, 안나벨(Annabel)이 와서 인사를 했습니다. 제 아내는 전부터 수중 분만을 원해서 안나벨에게 말을 했고, 안나벨은 욕조에 물을 받고 몇번씩 물 온도를 체크한 후에 아내가 들어 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가장 적당한 온도는 36도정도라고 하더군요.)

아내의 진통은 계속 되었고, 물속에 있던 아내는 배에서 계속 힘이 주어진다며 물 밖으로 나올 것을 원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러고도 진통은 계속 되었지만 확인해 본 안나벨은 아직 단계가 되지 않았고, 아기의 머리가 약간 비틀려 있으니 분만실 내를 약간 걸을 것을 권했습니다. 그리고도 진통이 계속 되었고, 아내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침대에 기대자 안나벨은 매트를 가져다 준다며 매트와 공을 가져왔습니다. (위 사진에 보이는 공이 바로 그 때 사용한 공입니다.)
매트 위에서 아내는 계속 진통을 했지만 생각대로 진척이 되지 않았고, 안나벨도 머리를 좌우로 저으며 아직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러기를 상당 시간 보내고 아내가 너무 어려워하고 통증을 호소하자 안나벨은 의사와 상의를 해서 다른 방법을 시도해 봐야겠다고 했습니다 (새벽 4시경). 잠시 후 남자 의사가 들어 왔고, 수축의 힘을 더 줄 수 있게 하는 링거(drip)를 놓아 준다며, 만약 그것도 되지 않을 경우 겸자분만(suction)의 방법을 사용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제 아내는 더 이상 힘을 줄 수 있는 자신이 없다며 제발 겸자분만으로 하자고 호소를 했고, 중간에서 그 말을 옮겨 주어야 하는 저도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곁에 계시던 장모님은 딸의 안쓰러운 모습에 눈물까지 보이셨습니다. (나중에 하시는 말씀으로는 미리 우황청심환까지 드시고 오셨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하기를 두어시간...
이런 것을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요.
링거를 맞기 위해 매트에서 침대로 올라 온 후 채 5분도 되지 않아 자신감을 잃고 낙심해 하던 아내가 계속 힘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앞에서 지켜 보던 안나벨도 놀랍다(brilliant)고 소리치며 아내를 격려했고, 그러기를 2-30분 후에 아기가 나왔습니다.
아내도 감격스러워 눈물을 글썽였고, 저도 옆에서 지켜 보고 있노라도 눈물이 핑 돌더군요. 아무튼, 제게는 아내의 출산을 바로 옆에서 지켜 볼 수 있는 아주 큰 행운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지켜 보았다기 보다는 아내에게 품이 끌려 거의 끌어 안고 격려를 하고 있었죠...^^)
아래는 곁에서 8시간 넘게 지켜 보며 도와 주었던 미드와이프인 안나벨입니다.

안나벨이 우리 아기의 무게를 재고 있습니다. 정확한 몸무게는 3359그램이고, 머리둘레(head circumference)는 34센티미터, 키(length)는 52센티미터입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을 위해 쓴 사실관계가 너무 길어졌습니다만, 정말이지 제 아내가 제 아들을 출산하는 그 현장에서 함께 안타까움과 고통을 한다는 것은 아내에게도 큰 위안이 되었고, 제 자신에게도 큰 추억이 될 것이고 행운이었습니다.
제가 위의 과정을 겪으면서 느낀 점을 몇가지 말씀드려보고자 합니다.
저는 그간 생활한 여기에서의 5개월여 동안 '도대체 영국이 뭐냐?'라는 생각을 항상 했었습니다. 한때 전세계의 몇분의 일을 식민지로 갖고 있었고, 아직도 commonwealth라는 연합체에서 중심적인 나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G7의 한 국가이고, OECD의 멤버국가라고 하지만, 이제는 미국에 밀려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고는 자신있게 말하기가 주저하게 되고, 유럽 내에서도 그 위상이 그리 크게 서 있지는 않는 것 같은, 누구의 표현대로 '석양에 지는 해를 바라 보는 노신사' 같은 나라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나라가 IT산업에서 눈부신 성장을 거두어 인터넷과 핸드폰이면 거의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경지에 와 있는 반면, 이 나라에서는 아직도 56k 모뎀 사용자가 다수이고, 그 나마 인터넷을 이용하는 인구가 많지도 않으며, 핸드폰을 이용 기술은 우리의 4-5년 전 수준에 밖에 있지 않는 나라...
거리에서도 함부로 무단횡단을 하거나, 담배꽁초를 버리고, 고속도로에서의 과속은 가히 가공할 만하며, 범죄율이 높아 정부에 대한 비판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고, 교사, 소방관 등의 파업문제가 끊이지 않는 나라. '영국 신사'라는 표현이 무색하게 백인 우월의식을 갖고 소수인종(minority)에 대한 은근한 경멸감...
한때는 '내가 이 나라에 뭘 배우러 왔나' 하는 생각까지 가졌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번에 아내의 출산과정을 통해 여러 미드와이프의 근무 태도와 자세, 이 나라의 정책을 보면서 그러한 생각이 거의 바뀌었습니다.
우선 임산부들에 대한 정책입니다. 저도 정확한 지식이 없어 자세하게는 설명드릴 수 없으나, 영국의 의료체계는 국가관리체제입니다. NHS(National Health Service)라는 이름이 나타내듯이 국가에서 건강에 대한 서비스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의료관련 비용은 무료거나 상당히 저렴합니다. 물론 나라에서 관리하다 보니 그에 따른 문제점이 많아 지금도 계속 정치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고는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의료서비스, 특히 임산부에 대한 고려를 생각해 본다면 이들이 약자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내를 맡았던 또 다른 미드와이프는 국가관리체제로 인해 지역마다 불균형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인이 되고, 자기들에 대한 임금도 만족스럽지 못하다며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서비스의 수혜자인 이 나라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그 얼마나 세심한 배려인지 모릅니다. 임신 10개월 내내 계속 방문하고, 만나서 상담해 주는 것이 저와 제 아내에게만 감동스러운 서비스였는지...
금전적인 문제 또한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데, 제가 위에서 설명드린 그 모든 과정이 무료였습니다. 거기에 더불어 출산 후 1년까지는 산모와 아기의 제반 의료비용을 감면해 주는 카드도 발급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르면 여러분들께서도 '야...'하지 않으실까 생각됩니다만...
둘째로, 미드와이프들의 자세입니다. 그들은 제가 피해의식과 같이 가졌던 생각, '너희들은 열등한 유색인종일 뿐이야...'라는 생각을 속으로 할지도 모릅니다. 겉으로는 웃고 친절한 척해도 속으로는 '나는 너희들보다 훨씬 우월한 백인이야...'라는 생각을 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그들과 만나 대화하고 그들의 서비스를 받으면서 그런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친절해서 위와 같은 생각이 도저히 나지 않을 뿐더러, 친절도에서만 비교하면 그들은 '우월하다'는 평가를 받을만 하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언젠가 읽은 이어령 선생님의 글 중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정'과 '친절' 등에 대한 글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일본의 친절이 아무런 감정없이 '기계적'인 반면, 우리의 친절은 겉으로는 무뚝뚝하지만 속으로는 정감있고, 끈적하다는 요지의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직 일본인의 친절은 경험해 보지 않아서 그 분의 글에 대한 제 의견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영국인 아니 좁게 말해 미드와이프들의 친절은 그것이 기계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기계적인 것은 얼마든지 배우고 익혀야 겠다는 생각을 절로 갖게 합니다.
제 아내가 아기를 낳은 병원의 시설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닙니다. 국가 관리체제에서 나온 문제 중의 하나이기도 하겠지만 시설에 대한 투자가 그리 활발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아래 제 아내가 있던 병실의 시설을 대충 둘러 보시면 어느 정도 추측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대개 산부인과들이 각종 최신 장비를 동원해 매 방문시마다 스캔 해 주고, 아기의 모습을 3차원으로 보여주고, 그 모습들을 비디오에 담아 주고, 또 각종 검사다 뭐다 해 주고 있습니다만, 위 병실과 같이 여기의 시설은 대부분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방식이고, 외관상으로는 꽤 오래되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하드웨어는 미비해 있더라도, 모든 미드와이프의 친절과 같은 소프트웨어가 철저히 되어 있는한 그들의 발전 가능성은 무한하며 언제든지 재도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모에게 미드와이프가 주는 아래와 같은 책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의 모든 내용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서점에서 판매하는 출산, 육아책자보다는 훨씬 얇아도 내용은 충실하게 되어 있고, 또한 무료입니다. (총 145페이지, 볼펜은 책자의 크기를 위해서 일부러 올려 놓았습니다.)
이곳의 제왕절개 수술율은 약 20%정도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여성과 이곳 여성과의 신체적 차이는 인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40%가 넘는다고 하는 우리나라의 제왕절개 수술율은 우리의 후진적 사고와 의료체제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여기서는 배우자며 보호자가 당연히 분만실로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실은 저와 장모님에게는 들어 가려냐고 묻지도 않더군요), 제가 들어가서 경험한 바로는 보호자가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도 배워야 할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에는 보호자를 입회하게 하는 병원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만...)

위와 같은 느낌 외에 개인적인 것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대부분의 여성이 갖는 '출산의 고통'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왜 어머니가 위대한 것인지를 느꼈습니다. 중학교 수업시간에 사춘기 어린 제게는 '성적인 농담'의 재료가 되었던 '정자와 난자' 만남, 그리고 그로부터 자궁에서의 성장과 출산... 이런 과정을 왜 '성스럽다'고 하는지 비로서 알게 되었습니다.
또 부수적이고 사소한 것이지만 제게는 많은 영어 공부의 시간이 되기도 했습니다.
contraction(수축), cervix(자궁문), placenta(태반), womb(자궁), cord(탯줄), open the vowel(똥누다) 등등...
이런 기회가 아니면 제가 사용할 일이 거의 없는 영어를 배우고 사용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또 여러 영국인들과 대화를 함으로 인해 잘 하지도 못하는 영어를 갈고 닦는 기회도 되었죠.
머나먼 타국에 와서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자기의 답답한 마음이나 고통을 직접 말하지도 못하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남편 하나만 믿고 건강한 아들을 낳고, 건강하게 지내주고 있는 아내에게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몇년 안되는 동안 많은 모습을 지켜 보아 왔지만 엊그제 출산 과정을 통해 보여준 제 아내의 모습은 정말 '위대하다'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여기 오셔서 아기와 아내를 위해서 늙으신 후에도 힘든 고생을 하고 계신 장모님도 항상 그랬듯이 감사합니다. 어려우시면서도 어려운 내색을 하지 않으시고, 호강만을 받으셔도 모자란 세월에 저렇게 희생하시는 장모님... 저는 그러한 부모가 될 수 있을지...

지금 애기는 엄마 젖을 먹고 또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습니다.

저도 저렇게 평안하고 순수한 모습을 가진 때가 있었나 싶기도 하고, 그런 반면에 내가 저 만한때, 특히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어려웠을때 나를 낳고 키우시느라 부모님이 얼마나 고생하셨을지 몸으로 직접 느끼니 그간의 불효가 죄스럽기도 합니다.
아들도 제대로 키우고, 아들 노릇도 제대로 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