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체 출현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1)
한참 전에 넷플릭스(Netflix)에서 "버드박스(Bird box)"라는 영화를 꽤 흥미롭게 보았었다. 당시만 해도 그 줄거리는 허무맹랑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그래도 주연배우였던 샌드라블록(Sandra Block)의 열연이 봐줄 만해서 건너뛰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했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실체가 정확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괴상한 무언가를 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 갑자기 좀비로 변하면서 자살 충동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 영화의 주된 요소 중의 하나였다. 영화에 등장한 수많은 인물들은 그 괴물체와 눈을 마주치게 되고, 결국은 건물에서 뛰어내리거나 달려오는 차로 뛰어드는 등의 자살 행동을 한 후에 죽게 되었다. 영화 상의 주연인 샌드라블록이 자신과 아이들을 이 괴물체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영화의 아주 간략한 내용이다.
"버드박스"는 같은 이름의 소설을 각색해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하는데, 넷플릭스에서 처음 개봉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괴물과 직접 눈으로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집이나 건물 밖으로 외출할 때 항상 천으로 눈을 가리고 움직이는 모습이 특이한 작가적 발상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도 했었다. 영화 안에서 괴물의 영향력에 빠지지 않기 위한 그 행동을 (물론 장난이었겠지만) 실제 생활에서 따라 하려던 사람들의 모습이 인터넷에서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했었다. 심지어 넷플릭스에서 눈을 가리고 돌아다니는 행위는 매우 위험하다는 공식적인 경고를 트위터로 내보낼 정도였다.
최근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전세계의 패닉을 직접 경험하면서 이전에는 그저 우습고 허무맹랑하다고만 생각했던 이 영화가 떠올랐다. 무언가 잘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는 것이나, 잘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공포스러워하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삶이 단기간에 급변한 것 등이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버드박스"의 경우와는 달리, 코로나바이러스는 이 이름을 갖게 되었을 정도로 실체가 드러나 있다. 그리고 아직 그 백신이나 치료법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곧 그 같은 조치가 나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내가 마주치는 사람 중의 누군가가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지 외관상으로 전혀 알 수 없고, 보균자 중에도 마른기침이나 고열 등의 증상이 없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 점에서 이 "버드박스"라는 영화의 "괴상한 무언가"를 떠오르게 되었다. 이 괴상한 무언가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특별한 일이 아니면 집 밖을 나서지 않고,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는 대면 접촉을 거의 하지 않는 것 등은 영화와 아주 유사한 장면이기도 하다. 내가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던 그 영화 속 같은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학교에 출근을 했던 것은 지난 3월 12일이었다. 중국과 한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로 엄청난 혼란을 맞고 있던 1월과 2월 중에도 태평하던 미국은, 3월 초에 급작스런 상황인식의 변화가 있었다. 2월 말경만 해도 서부의 시애틀과 엘에이, 동부의 뉴욕 등의 일부 도시에서 아주 소수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대통령도 나서서 별문제가 없을 것이고, 미국은 이 문제와 관련해 제대로 통제가 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3월 초가 되어 급작스런 상황인식의 변화가 있었고, 급기야 그렇게 자신만만하던 미국 대통령은 3월 11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험성을 인정하고 국민의 협조를 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이 나라의 거의 모든 분야가 이전과 달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이 같은 상황을 9/11 테러 사건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이 바이러스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영향이 이전의 테러 사건과 비슷할지 혹은 훨씬 더 클지 예견하는 것도 이른 것으로 보인다.
내가 출근하는 대학교도 3월 12일을 마지막으로 모든 수업이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었다. 교수에 따라서는 자신의 선호나 철학에 따라 온라인 수업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고, 음악이나 미술 전공 등 과목에 따라서는 온라인 수업이 적절치 않아 온라인으로 진행하지 않던 과목들도 있었지만, 봄방학 다음 주인 3월 30일부터 모든 과목이 온라인으로 변경될 수 있도록 조치하라는 교내의 공고도 이때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과목을 온라인으로 가르쳐왔었고,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 과목들도 강의관리시스템을 통해 학생들이 퀴즈나 다른 과제들을 제출하도록 했었기 때문에 이 전환 과정이 아주 드라마틱하지는 않은 편이다. 그래도 범죄지도 과목의 경우는 컴퓨터실에서 학생들이 직접 실습을 하도록 설계가 되었기 때문에 비디오 강의 등을 준비해야 한다. 또 조사방법론의 경우에도 데이터 분석을 통해 그룹과제나 개별과제 등을 한 후 수업 중에 발표하는 것이 전체 과목 중에 큰 부분을 차지했었는데, 이 또한 온라인에 맞도록 변경을 해야 했다.
이 같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면, 학기 시작 전에 만들었던 강의계획서 상에도 원래 지난주(3/16-3/20)에는 강의를 하지 않는 것으로 설계했다는 점이다. 뉴올리언스에 학회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학회 참석으로 수업을 취소했던 것이었는데, 물론 이 학회도 취소되었다. 학생들에게는 원래 계획대로 강의를 하지 않는다고 공고를 하고, 온라인으로 전환되는 다음 수업은 봄방학(3/23-3/27) 이후인 3월 30일부터 진행한다고 전달했다.
물론 원래부터 온라인으로 진행되던 과목들은 그대로 진행되고 있지만, 교실에서 직접 가르치던 오프라인 과목은 내일부터 시작되는 이 봄방학 기간 동안을 활용해서 모든 것을 확정시켜야 한다.
이와 비슷한 혼란 상황은 나뿐 아니라 유빈이와 혜빈이가 다니던 학교에도 발생했다. 어쩌면 대부분의 성인을 가르치는 나의 학교보다 유빈이 혜빈이와 같은 초중고교 학생들을 책임지는 지역 교육청이 더 큰 혼란을 겪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의 학사일정 변화는 아이들 뿐 아니라 부모 등 이들 보호자들에게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유빈이와 혜빈이가 속한 학군이 달라, 이 두 학군의 의사결정이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그래도 거의 동시에 초중고교의 수업을 중단한다는 공지가 비슷한 시기에 전달되었다.
거의 매일같이 학부모들에게 전달되는 텍스트와 전화, 이메일 등을 통해서도 교육행정가들이 얼마나 고심을 하면서 결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애초의 결정 사항은 3월 말(혜빈이의 경우) 혹은 4월 초(유빈이의 경우)까지 학생들의 수업을 중지한다는 것이었지만, 최근 콜로라도 주지사의 결정에 따라 (일단) 4월 셋째 주까지 콜로라도의 모든 공립학교의 학교 수업을 중단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대부분의 교육청에서는 이전에는 전혀 시도해 보지 않았던 전체 학생대상의 온라인 수업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집행이 될지는 기다려 봐야 한다. 지금 유빈이, 혜빈이 모두 집 밖을 나간 지가 거의 열흘이 되어 가고 있는데 아마도 이 지역의 모든 가정들이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뉴욕이나 엘에이, 시애틀 등 상황이 더 심각한 도시에서는 여기보다 훨씬 더 일찍 이 같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이들 도시의 학생들의 외부인들과의 격리는 더 오래되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이 같은 사재기 현상이 마지막으로 나타났던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미국 생활을 시작한 것이 오래되지 않았으니 이곳에서 "옛날 얘기"를 할 자격은 없지만 적어도 내가 살았던 지난 10여년 동안에는 보지 못했던 현상이다. 어제 읽었던 한 잡지의 저자가 말했던 대로, 미국이란 나라에서 상점의 진열대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풍족한 나라이고, 그만큼 소비욕구를 잘 채워 주는 경제 시스템을 갖고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코로나바이러스의 패닉이 여러 곳에서도 현실화 되면서, 특히 대통령이 직접 현실을 인정하고 온 국민의 통합과 협조를 구하는 것이 오히려 더 불안감을 부추기면서 거의 모든 상점에서 사재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코스트코와 같은 대형 매장은 물론 아주 작은 달러 스토어 같은 곳에서도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화장지의 품귀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 신문과 잡지, 라디오 등에서도 왜 이 화장지가 이리도 "특별 대접"을 받는지에 대한 분석 기사들이 나오고 있고,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집에 남아 있는 화장지 수를 근거로 앞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을 계산해 주기도 한다니 신기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이 같은 불안감은 코로나바이러스만큼이나 그 전파력이 강해서 모든 상점의 식품 코너, 특히 캔으로 된 음식이나 파스타 등 비교적 보관이 오래가는 식품들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학교들이 문을 닫기 시작할 무렵, 아내도 한국 음식점과 동네의 미국 상점에 가서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을 집에 사다 놓았는데 마치 전쟁 중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그동안 먹었던 아이들 스낵이 거의 다 떨어져서 어제 동네 월마트를 나갔는데, 그래도 뉴스에서 보고 듣던 바와는 달리 채워져 있는 진열대도 많았다. 특히 신선한 음식 재료 코너는 평상시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고, 콜라나 과자 등 다른 음식 등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캔으로 보관되는 음식이나 냉동식품, 파스타 등의 면제품 등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그 유명한 화장실 화장지 코너도 거의 비어져 있었다. 그래도 6개 들이 화장지가 방금 진열되었는지 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나도 운이 좋게 하나 구입할 수 있었다! (한 명당 하나로 제한이 된다고 직원이 공지하고 있었다.)
나와서 쇼핑을 하는 사람들의 수도 예전의 비슷한 시간에 비해서 훨씬 적었고, 나처럼 장갑을 끼고 카트를 몰며 다니는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장을 보는 사람들이 일부 있기는 했지만, 거의 대부분 어른들만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대부분은 다른 사람들과 상당한 거리를 두면서 물건을 고르고 있었고 이곳에서 그렇게 보기 힘든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니는 아저씨도 둘을 보았다.
서둘러 꼭 필요한 것들만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기분이 그렇게 상쾌할리 없었다. 서로 이기적이어야 생존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의 상점이라는 것을 절감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서 짐을 내리자마자, 아내는 티슈를 꺼내어 물건들의 겉을 닦아내었다. 물론 이런 위기상황에서 생긴 "새로운 일상(new normal)"의 한 부분이다.
"창궐"이라는 말을 어려운 단어의 하나로서만 배웠고, 이 단어가 쓰일 때도 대부분은 비유적인 상황을 표현할 때 과장하면서 사용하는 것으로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창궐이라는 말이 가장 적절할 것으로 생각할 정도의 상황이 되었다.
지금으로서는 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생긴 이런 공포와 두려움이 언제 없어질지 장담하는 사람들을 찾아 보기 어렵다. 질병에 관한 전문가들조차도 수 주에서 수개월 가량 걸릴 수 있다는 막연한 예측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설령 이 바이러스의 예방하고 치료하는 방법이 개발된다고 하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개량되고 악화된 또 다른 형태의 바이러스가 계속 발생할 것을 예측하는 이들도 있다.
이전 같으면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염세적 예견을 쉽게 떨쳐내 버릴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나의 세대, 그리고 나의 자녀 세대만 하더라도 전쟁을 직접 경험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지금 나와 나의 가족, 그리고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이 같은 비현실적 일상이 전쟁과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바이러스가 결국은 퇴치되더라고 이로 인한 후유증은 얼마나 거대하고 얼마나 오래갈지 짐작할 수도 없다. 다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여러 현상을 보건대, 최소한 대인간의 친밀한 접촉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크게 변할 것으로 생각한다. 지인이건 초면이건 자신을 소개하거나 만남으로 인한 반가움을 표시하기 위해 내미는 악수의 손을 두렵게 바라볼 것이고, 학교나 직장에서 가십을 나누기 위한 귓속말도 찾기 어려울 것이며, 같이 부둥켜안고 웃거나 울면서 슬픔과 기쁨을 나누는 일들도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몸을 부딪히고 같이 땀 흘리며 즐기는 농구 경기를 먼저 제안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전철이나 버스, 비행기를 타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경우나 부분이 아니면 손을 대지 않을 것이고, 혹여나 자기도 모르게 재채기를 하거나 기침을 하는 사람들을 눈 흘겨 보는 일도 잦을 것이다. 내가 친밀하지 않은 어떤 물체에 손이 닿으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비누로 손을 닦는 것이 식사 후 양치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습관이 될 것이다.
어쩌면 이런 사소한 일상의 변화가 전쟁으로 인한, 테러로 인한 사람들의 태도 변화보다 더 무서운 것이 아닌가 싶다. 전쟁이나 다른 국난을 겪게 되면 그로 인해 같은 집단의 사람들이 더 뭉치고 합심하고, 남에게 (말 그대로) 더 가까이 다가가 친밀감을 표시할지언대 이런 보건적 재난의 영향은 그와 전혀 다를까 우려된다. 남이 가까이 오면 나는 한 발을 더 뒤로 뺄 것 같고, 혹여나 침을 튀기며 연설을 하거나 강의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리를 옮겨 더 떨어지려고 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물론 나의 이런 모든 우려가 현실화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그랬듯 나의 아이들도 그의 친구나 지인들과 몸을 부대끼며 운동하고 활동하며 성장하기를 바라고, 이들의 자녀들, 그리고 그 자녀의 자녀들도 군집생활에서 서로의 감정을 몸으로 직접 표시하면서 생활하기를 희망한다.
이전에는 너무나 당연해서 의식적으로 생각해보지도 않았을 나의 이 같은 희망이 어떻게 될지 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시급한 것은 이 상황이 하루라도 빨리 끝나도록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권고하는 시책에 적극적으로 응하는 것이 기왕 발생한 이 참혹한 재난을 함께 극복하는 것으로 믿는다.
영화 "버드 박스"는 주인공이 그 괴물체의 정체를 알아 낸 후 그를 쳐 부수고 승리하는 해피 엔딩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 인류가 사라지는 씁쓸한 결말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주인공과 그 자녀들이 비슷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피난처에 도착하는 것으로 맺고 있다. 원작인 소설의 내용은 모르지만, 아마도 그 후속작을 염두에 둔 의도적 결말이지 않을까 짐작해 볼 뿐이다.
물론 우리는 이 영화에서처럼 피난처로 숨는 것으로 안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백신과 치료제가 나올 것이고 언젠가는 이 괴물체를 쳐 부술 것이며 심난하고 두려운 하루하루 속에서도 일상은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물론 그것이 내가 약 2주 전까지만 해도 누렸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일상이더라도, 그 변화된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살기 위해 냉정하게 준비를 하는 것 또한 지금 이 재난 시기에 나의 가족부터 시작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