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현 사는 법

백발의 노인이 되어 가는 과정

남궁Namgung 2018. 10. 21. 05:22

가을의 절정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하늘은 맑고 공기도 신선하며 어디를 둘러 봐도 기분이 좋다. 근처를 다녀 보면 이미 낙엽이 떨어져 어지럽게 뒹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아침 저녁에는 꽤 선선해서 집의 찬 마룻바닥을 거닐 때는 실내화를 신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여유로운 토요일, 나는 지금 예전에 자주 다니던 도서관에 와 있다. 처음 덴버로 이사왔을 때 약 5개월여 정도를 잉글우드(Englewood)라는 동네에서 살았는데, 그때 일하러 자주 왔던 도서관이다. 도서관 바로 옆에  전철 역이 있어 출근하는 날 아침이면 아내가 나를 태우고 이 건물로 와서 내려 주고, 일이 끝나면 나를 태우러 다시 오기도 했던 곳이다. 그만큼 익숙한 곳이다. 


그런 이 동네를 오늘은 다른 일로 왔다. 유빈이가 몇달 전에 인턴십(internship)을 시작했다. 제 학교의 아는 선배로부터 소개를 받아서 지난 여름에 인터뷰를 했었고, 다행이 그곳에서 같이 일해도 좋다는 소식이 있어 이곳으로 한달에 한번꼴로 오곤 한다. 미국의 한 보건회사 내에 청소년 봉사관련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곳에서 청소년의 건강 증진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행하는 일을 도와주고 있다. 물론 유빈이 뿐만 아니라 다른 고등학생들이 같이 일하고 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한달에 한번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모여서 회의도 하고, 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차가 막히지 않으면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30분이 걸리지 않는 곳이긴 하지만, 아침에 왔다가 다시 집에 돌아 가서 오후에 다시 데리로 오기는 좀 번거로운 거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같이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은 유빈이를 아침에 사무실 앞에 내려주고 나는 근처의 도서관에서 일도 하고, 이렇게 글도 쓰면서 시간을 채우고 있다. (지금 이 도서관은 오전 늦게 열어서 다른 도서관에 들었다가 점심을 먹고 다시 이곳으로 왔다.)


혜빈이는 이전에 시작한 배구팀 경기가 낮 12시부터 열려서 거기에는 아내가 데리고 갔다. 주중에 한시간 반정도 같은 팀과 연습을 한 후, 그 팀들이 주말에 모여 리그 식으로 경기를 한다. 내가 보기에 아직은 한참 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은 실력이지만 그래도 제 나름으로는 연습에도 열심히 참석하고 제가 보이고 있는 기량에 만족해 하는 모습이다. 


이곳에서 유빈이나 혜빈이 또래의 아이들을 둔 많은 가정의 주말은 나와 아내의 주말과 비슷할 것이다. (물론 더 많은 과외활동과 특별활동을 시키는 경우라면 주중에도 바쁠 것이다.) 이런 날 시내를 운전하고 다니면서 가끔은 "저 많은 차들 중의 얼마나 많은 차들이 나처럼 애들을 데리고 이곳 저곳을 오가고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정말 많은 변화다. 처음 이동네로 이사와서 지금 이 도서관에 애들을 데리고 다닐 때만 해도 유빈이, 혜빈이가 모두 초등학생이었다. 당시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애들이 다니는 학교까지가 그리 멀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파트 앞으로 오는 스쿨버스를 태워 보내면서 손을 흔들며 초등학생 학부모의 노릇을 했던 것이 벌써 5년도 더 되었다. 


이제 유빈이는 곧 만 16세가 되니 얼른 자동차 연습을 해서 차를 타고 등교를 하고 싶다며 아직은 어림없는 소리를 하고 있고, 혜빈이도 이제 숙녀가 다 되었다. 그러고 보면 아침 저녁으로 씻은 후 거울을 볼때마다 늘어나는 흰머리가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현상이라며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유전을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굳이 이런 비교가 필요 없겠지만 불과 30-40년 전만해도 지금의 내 나이는 그리 적은 나이로 여기지 않았었 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그렇게 젊고 청년처럼 보았던 나의 가까운 가족, 친척이 이미 50대, 60대가 되었으니 내가 지금 40대 중반이 훌쩍 넘었다는 사실은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일게다. 기회가 될 때마다 흰머리 보이지 않게 염색을 해주겠다며 나의 나이든 머리를 걱정해 주는 빈도가 늘었지만 아직은 괜찮다고 사양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내 나이 정도였을 때 아버지는 집 앞의 친구 아버지께서 하시던 미용원에서 염색을 하시는 일이 잦았으니, 내가 그리도 흰머리에 신경이 쓰인다면 차라리 염색을 하고 머리에 신경을 덜 쓰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나와 비슷한 키와 덩치를 갖춘 유빈이, 제 엄마와 비슷한 사이즈의 옷과 신발을 신고 있는 혜빈이를 보고 있노라면, 저렇게 계절이 오고 가고, 나무의 잎이 피고 지며, 눈이 쌓이고 녹는 저 큰 자연 속에서 나는 아주 작은 구성원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어쩌면 컨베이어 벨트 위의 작은 부품들 처럼 노력하지 않아도 나는 백발의 노인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저절로 움직여 가겠지만, 그 속에서 성숙한 존재, 가족과 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그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보게 된다. 


이제 잠시 후에 유빈이를 데리러 나가봐야 한다. 나는 고등학교 1, 2학년이던 저 나이 때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어떻게 자라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