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보람
우리 과에는 금요일에 진행되는 수업이 없다. 물론, 온라인 과목들은 일주일 내내 계속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학생들을 만나고 직접 대화를 하는 수업은 없다. 한달에 한번 과 교수들이 모두 모여 학과 회의를 하기도 하고, 학교의 이런 저런 위원회 (committee)들이 각기 일정에 따라 개최되기 때문에 그 위원회에 속한 교수들은 제 각기 그 일정에 따라 금요일에 출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일을 제외하면 금요일의 학과는 아주 조용하다. 거의 항상 출근하는 행정을 보는 직원과 상담을 담당하는 직원, 그리고 프론트를 담당하는 학생을 제외하고는 교수들 방의 문은 닫혀 있는 경우가 많다.
나도 이전에는 금요일에 사무실에 나와서 일을 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물론 일이 없는데 일부러 나올 필요가 없을 것이고, 왠만한 것들은 이메일로 처리가 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유빈이가 학교를 옮기면서 아침 저녁으로 데려다 주고 오기 위해 다운타운 쪽으로 운전해 오기 시작한 이후로는 금요일에 사무실에 출근해 적막한 이 학과에서 혼자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잦아 졌다.
간혹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쉬다가 유빈이 방과 후에 데리러 오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한달에 있는 4-5번 금요일 중 서너번은 사무실에서 지내다가 점심을 먹고 유빈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오늘도 아침 일찍 유빈이를 데려다 주고 학교로 나왔다. 하지만 오늘은 학교에 행사도 있기에 어쨌든 나와야 하는 날이었다. (2017. 4. 21.)
지난 몇학기 동안 가르친 과목이 조사방법론 (Research Methods)이다.
범죄학은 물론 거의 모든 자연과학, 사회과학 분야에서 그 분야의 현상이나 논점 등을 이해하기 위해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사방법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 기본을 배우고 가르치는 과목이다. 대학원때도 비교적 재미있게 배운 과목인데, (다소 논란이 있는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주제가 언제,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하고 그 방법들의 장단점 등에 대해 쉽게 정리해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좀 속된 말로 "딱 딸어지는 것"이 많은 과목이라고 해야하나...
아무튼, 누가 무슨 주장을 하는지, 왜 그런 이론이 타당하거나 그렇지 않은지 등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따져야 하는 범죄학이론 과목 경우는 내게 아직도 쉽지 않은데, 조사방법론은 비교적 편하다. 특히, 최근의 논란이나 연구 등을 소개하면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수업을 준비할 때도 재미있을 때가 적지 않다. 그리고 대학원 과정때 잠시 지도교수님의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데이터 입력부터 분석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기 때문에 책이나 논문 등에서 말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내가 배우기에 재미있거나 편하다고 해서 가르치는 것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이번이 이 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한지 네번째 혹은 다섯번째 학기일터인데, 이제서야 조금씩 강의실에 들어가는 부담이 적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이 과목도 수업을 준비하기가 수월하지는 않았다. 과목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책도 보고 자료를 찾아 보고 강의실에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강의 방법과 강의안을 마련하려고 했지만, 그런 방법들이 제대로 효과가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2-3학기가 더 필요했다.
지난 학기부터는 조사방법론 과목의 학기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고, 전반부는 학생들 4-5명으로 이뤄진 그룹으로 나눠서 그룹 프로젝트를 하도록 하고 후반부는 학생들 개개인이 프로젝트를 하도록 했다. 물론 그룹과 개인 프로젝트는 서로 다른 주제로 했는데, 몇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지난 학기부터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학생들도 전에 해보지 않던 데이터 분석을 하고, 그냥 앉아서 강의만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직접 뭔가를 툭탁거리면서 결과물을 내는 것에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이번 학기에도 이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처음 1-2주는 아주 조사방법론의 아주 개괄적인 내용으로 시작하고, 3-6주 정도는 세부적인 내용을 다루다가 7-10주 정도에 그룹별로 발표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후에는 학기가 정리되어 가는 요즘에는 학생들 각자가 미국의 여러 공사기관에서 모은 범죄나 형사정책 분야 데이터를 모아서 분석하고 있다. 보통 11주차 정도에서 학기 말까지는 이렇게 각자 연구 주제와 방법을 정하고, 이달 말부터 다음달 말에 걸치는 학기말에는 이 결과물을 다른 학생들 앞에서 발표하게 된다. 일부 학생들은 이런 과정에 좀 버거워 하기도 하지만, 그중 일부는 내가 깜짝 놀랄만한 연구 주제를 찾아서 분석해 내기도 하고 있다.
지난 학기가 끝나고서는 이 과목에서 개인 프로젝트로 준비해서 발표한 학생이 이 연구물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컨퍼런스에 참여하려고 한다면서 내가 그 멘토가 되어 줄 수 있느냐고 묻는 이메일이 왔었다. 학기 중에도 아주 열심히 했던 학생이었고, 먼저 알아서 연락하면서 도움을 구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약간 놀라면서도 반가웠던 기억이 있다. 흔쾌히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었는데, 그 학생의 컨퍼런스가 오늘이었다. (이곳이 행사 관련 웹사이트)
지난 2-3개월 사이에 사무실에도 몇번 찾아와서 자신의 계획을 얘기하고, 2-3주 전부터 실질적인 결과물을 보여주면서 내 의견을 구하기에 몇몇 조언을 해주었었다. 워낙 똑똑하고 부지런한 학생인지라 몇마디만 해줘도 찰떡 같이 알아 듣고 포스터를 잘 완성해서 오늘 컨퍼런스에 참여했다.
오전 9시 30분에 시작하는 것이라 잠시 시간을 내어 가서 등록 테이블에 가서 사인을 하려는데, 멘토로 역할을 한 교수들에게도 감사 증서와 커피컵을 하나씩 주는데, 괜히 뿌듯하고 행사 준비한 사람들이 참으로 신경 많이 썼다는 기분을 들게 했다.
앨리슨이라는 학생은 옷도 깔끔하게 차려 입고 와서 이미 다른 참여자들에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다른 참여 학생들의 포스터도 대충 훑어 보니 제각기 그간 연구한 것들을 잘 정리해서 발표하고 있었다.
<그럴싸한 종이에 이름을 큼지막히 인쇄해서 학생들 연구에 도움을 준 것에 대한 인정을 해주는 증서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지금 참여도 고맙지만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이 프로그램을 지원해 달라는 마케팅 목적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기분 좋은 증서다.>
<앨리슨 알고 보니 학교와 학과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열혈 학생이었다. 수업과 다른 발표, 행사들로 정말 바쁜 학기였다고 하는데, 나는 이 학생 나이때 무엇을 했었나 생각하게 만든다.>
행사장에서 먼저 나오면서 나의 참으로 게을렀던 대학생활과 비교하면 정말 이 학생들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학생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학생일 때도 분명 학교 안과 밖에서 이런 기회들이 많았을텐데 생각해 보면 그 소중한 젊은 시절에는 뭔가 거창하게 한 것이 아무것도 없지 않나 싶게 비어있는 기간이 많다. 그렇게 실컷 놀아서(?) 저 학생들의 수고가 더 가상하게 생각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저 학생들의 나이 때에는 그렇게 학교 생활이나 학문적 행사에 무관심하고 심지어는 무기력했을지라도, 앞으로도 (최소한 이 조사방법론 과목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학교 내외의 이런 저런 발표 자리를 소개하면서 참여시키도록 해야겠다는 계획도 들었다. 분명 능력, 자질, 관심이 모두 있으면서도 이런 저런 이유도 참여를 못하는 학생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슨 과목이든지 과목 설계만 잘 하면 학생들에게 일부러 시간을 투자하도록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수업 프로젝트만으로 충분히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이번에 확인했다.
앨리슨은 가을에 필라델피아에서 있는 학회에도 참여할 의향을 보이는데, 잘 하면 그때 필라델피아에서도 보겠다.
아마 교사들, 교수들이 그 직업에서 가장 큰 만족감이나 보람을 얻을 때가 있다면 이같은 학생의 성장을 지켜 보고 각기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