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현 사는 법

상징과도 같은 책

남궁Namgung 2017. 1. 25. 10:37


지난 주에 새 학기 (2017년 봄학기)가 시작되었다. 지난 월요일은 공휴일이어서 화요일에 공식적으로 학기가 시작되었지만, 이번 학기에도 나의 수업은 월요일과 수요일에만 있다. 그래서 벌써 하루를 건너뛰는 행운(?)을 가졌다. 


수요일의 첫시간에는 학생들과 학업계획서만 쭉 훑어 보고 질문이나 다른 필요한 사항이 있는지 확인만 했다. 그래서 실제로는 어제가 이번 학기의 첫 시간이었다. 다른 교수들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까지 학기의 첫 시간을 그 과목의 필요성을 여러가지 사례 등으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진행해 왔다. 


가르치는 내용이나 방식이 얼마나 더 좋아지는지 내가 객관적으로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최소한 이전 여러 학기 보다 엊그제 첫시간에서의 긴장감은 훨씬 덜했다. 사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이경우에는 학생들) 앞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나 혼자 떠들어 대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한국말로도 그럴진대, 버벅거리는 영어로 하는 경우에는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이전에는, 특히 첫시간에는, 나 스스로도 목소리가 긴장감으로 가볍게 떨리는 것을 느낄 때가 간혹 있었다. 


다행,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익숙한 환경, 익숙한 교실, 항상 쓰는 칠판 (혹은 프로젝트 스크린)과 컴퓨터, 그리고 이번 학기와 비슷한 내용으로 진행하는 수업 때문인지 꽤 편한 느낌까지 들었다. 학생들 중 일부는 이전 과목에서 만난 학생들도 있어서 가볍게 눈인사도 나누고 시작했다. 


새 학기 첫날이니 그랬겠지만, 거의 대부분 학생들은 눈을 똘망똘망 하게 뜨고 내가 무슨 말을 하려나 쳐다 보면서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고맙기까지 했다. 두 과목을 교실에서 가르치는데, 각 과목에 언뜻 보아도 60대 가까이 된 노학생이 한 명씩 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노년에 학구열을 태우는지는 학기가 지나면서 알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다만 가끔 교실에서 저렇게 연세든 분들이 앉아서 젊은 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하려는 모습을 보면 내 스스로 더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가끔 "이 나이에..."라는 생각을 하고 싶을 때마다 저렇게 자식보다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 노트 필기하고 교수로부터 어떻게든지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그들의 열의를 생각하게 된다. 




유빈이를 방과후 오케스트라 연습에 넣어 보내고 근처의 맥도날드에서 커피 하나를 시켜 기다리고 있다. (2017. 1. 24.) 


지난 몇주째 화요일 저녁이면 유빈이를 들여 보내고 이곳으로 왔던 것 같다. 1불짜리 하나 시켜서 1시간 반가까이를 때우고 가는데, 아무도 눈치 주지 않아 좋다. 보통은 커피를 마실 때 블랙으로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데, 오늘은 설탕을 한스푼 넣어 달라고 했다. 왠지 모르겠다. 그냥 뇌에서 슈거가 필요하다고 신호를 보냈다. 요즘에는 설탕이 든 음식이나 음료수도 많이 먹거나 마시지 않았으니 이 적은 설탕 때문에 건강을 신경 쓸 필요가 없겠지. 


주인이 크리스챤인지 올때마다 항상 팝처럼 들리는 크리스챤 음악을 틀어 놓고 있다. 이스트 콜팩스 (East Colfax)라고 흔히 불리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 이 시간 정도에는 앉아서 음식을 먹거나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채 10명도 되지 않는다. 동네 특성 때문인지 올 때마다 홈리스 아저씨 아줌마들이 꼭 한두명은 있어서 싼 메뉴를 시켜서 혼자 먹는 사람도 있고, 어떤 때는 둘셋이서 같이 크게 얘기하는 소리도 들린다. 오늘은 저 구석에서 두명이 조용히 음식을 먹고 있고, 다른 두 테이블에 한명씩 앉아서 음식을 먹거나 전화를 하는 사람이 있다. 




유빈이는 비교적 먼거리로 통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일어나야 하고, 그렇기에 잠을 자는 시간이 부족할 것이다. 


오늘도 학교에서 3시경에 픽업을 해서 오케스트라 시간까지 2시간 반 정도를 학교 근처의 도서관에서 같이 기다렸는데,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에 엎어져 자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잠 많은 것은 분명 나를 닮았는데, 그래도 (아직까지는) 불만 없이 학교 가자는 시간에 딱딱 일어나서 학교에 가고, 학교에서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은 모습이 대견하다. 




제가 분명 첼로로 대학을 갈 것이 아니고, 첼로로 밥 먹고 살 것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첼로 개인레슨이나 오케스트라 연습이 있을 때면 (이것도 아직까지는) 다른 소리 하지 않고 첼로 챙겨 학교로, 레슨 선생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도 흐뭇하다. 


사춘기 한 복판에 서서 저도 스스로의 신체 변화나 감정 변화 등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을 것이고, 저를 잘 이해해 주지 못하기도 하고 따스히 대해주지 못하는 제 아빠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을터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제가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 등으로 스트레스도 줄이려고 하고, 제 마음이 풀리면 제 엄나나 나한테 이것저것 영화 얘기도 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대견할 때도 많다. 


아무쪼록 큰 무리없이 이 "격동의 시기"를 잘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 (그런데 이제 혜빈이가 시작하려는 조짐이...)






오늘은 학교에 갈일이 없어 유빈이를 학교에 내리고, 자동차등록사무소 (DMV)에 들러 자동차세를 내고 번호판에 붙이는 유효기간 스티커를 받아 왔다. 


8시에 문을 여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가보니 벌써 많은 사람들로 그 넓은 곳이 바글바글하다. 벽을 보니 7시에 문을 여는 것으로 시간이 바뀌었다고 안내문이 붙어있다. 어느 나라의 자동차등록사무소가 다 그렇겠지만 미국은 특히 긴 줄과 오랜 대기시간, 무뚝뚝한 직원들로 악명이 높다. 다행 나처럼 매년 갱신하면서 세금만 내는 업무는 복잡하지 않아서 일찍 처리가 되는 편이다.  


내가 도착해서 뽑은 번호표는 60번. 자리에 앉아서 업무처리판을 보니 30번대의 번호표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약 30분 정도에 일을 마칠 수 있었으니 이 정도면 훌륭한 편이고, 직원 아줌마도 친절하게 웃으며 업무를 도와준다. 


9시에 문을 여는 집근처 도서관에 갔더니 아직 10분 정도 남아 있다. 차에서 잠깐 기다리며 스마트폰을 끄적이다가 9시 정각에 문을 여는 직원의 인사를 받으며 들어가서 11시 정도까지 있다가 나왔다. 날이 제법 쌀쌀하고 가볍게 눈발이 내리더니 그쳐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따끈한 칼국수를 먹고 싶었는데,아내가 이미 칼국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찍 먹은 아침 때문에 10시가 넘어서부터는 허기가 느껴졌었는데, 얼큰하고 시원한 칼국수를 배불리 먹고 잠시눈을 붙이고 피로(?)를 풀었으니, 이런 임금같은 생활이 어디있을까. ㅎㅎ




학생들 가르치는 일에 소요되는 시간이 전보다 훨씬 줄어 들면서 이것저것 논문 쓸 거리를 찾거나, 이전에 쓰다 만 것들을 다시 끄적이고 있다. 올해부터는 좀 가시적으로 논문이나 다른 결과물을 생산해 내겠다는 계획이 있는데, 이렇게 하루하루 끄적거리기라도 하면 언젠가 눈에 보이는 실적들이 하나씩 둘씩 생기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 (그렇다, 지금은 1월이다!)


논문을 끄적이던 중, 필요한 자료가 있어서 집에 점심 먹으러 들렀다가 책장에 오랫동안 꽂혀 있기만 했던 책을 꺼냈다. "The Politics of the Police" 라는책으로, 영국의 유명한 경찰학자인 로버트 라이너 (Robert Reiner) 교수가 쓴 책이다. 특히 영국에서 경찰을 공부했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갖고 있거나 최소한 책의 일부라도 읽어 봤어야 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책이다. 



이제 15년도 더 넘었는데, 나는 영국에서 처음 공부를 하면서 이 책을 알게 되었고 당시 공부하던 학교 서점에서 산 기억이 있다. 책의 표지를 약간 딱딱하고 투명한 플라스틱 재질의 커버로 붙이는 것이 있어서 그것으로 책 표지를 붙였었다. 


다른 몇몇 책보다도 이 책은 내 영국 생활, 특히 영국에서의공부할 때를 생각나게 해 주는, 말하자면 나의 영국 유학 생활의 상징과도 같은 책으로 여기고 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책의 내용이 영국 경찰에 대해서 주로 다루고 있고, 비교적 어린 나리에 처음으로 유학 생활하면서 신기하기도 했던 때이며, 혼자 뿌듯하면서도 은근히 자부심까지 갖고 있을 때 곁에 두고 공부하던 책이라 그런지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 필요한 내용이 있어 책을 뒤적이는데, 색연필로 여기저기 밑줄을 그어 놓거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체크한 부분들까지 모두 흐뭇하게 생각되어진다. 한참 전에 산 책인데도 사자마자 튼튼한 커버로 보호해서 그런지 많이 상하지 않았다. (아니, 내가 이 책을 많이 안 봐서 더 그럴 것이다. ^^) 


그렇게 저 책으로 공부하며 희미하게 먼 미래를 구상했었을텐데, 그 구상이 현실로 되서 이렇게 다시 저 책을 쳐다보며 또 다른 형태의 미래를 구상하고 있다. 


10년, 15년, 아니 20년 후에는 어떤 나라, 어떤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저 책을 뒤적이고 있을지 벌써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