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현 사는 법

입으로만 효도

남궁Namgung 2017. 1. 11. 10:04


오랜만에 사무실에 와서 이것저것 많은 일을 처리했다. (2017. 1. 9.)


집에 있으면서 며칠 동안이나 처리할 것을 오늘 오전 동안에 다 처리한 듯하다. 며칠 전부터 사무실에 와서 해야 할 일들 리스트를 적어왔는데, 그 체크리스트를 보면서 하나 하나 챙겼더니 일이 아주 건설적이고 효율적으로 처리된 것 같다. 연구하는데 필요한 리포트 (혹은 책)를 프린트 하고, 학과장을 만나 물어볼 것과 상의할 것을 얘기하고, 이메일 등 연락해야 할 곳에도 소식을 전했다. 


아직도 좀 더 가다듬어야 하기는 하지만, 이번 봄 학기 과목의 학업계획서도 가다듬고 일단 초안을 프린트해서 검토할 준비를 해 놓았다. 온라인 상에 올려 놓았던 자료들도 다시 확인하고 다음 학기 시작하는데 맞게 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주중에 두세번 정도만 더 재검하면 일단은 다음 주 학기 시작에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월요일이 이곳 공휴일 ( Martin Luther King Jr. Holiday)이라 화요일에 공식적으로 학기가 시작되는데, 나의 수업은 월요일과 수요일에만 있다. 지난 학기와 마찬가지로 학교에 출근하는 날은 많지 않아 좀 여유가 있을 것 같다.


방학 마지막 주이다. 언제나 이런 생각이 들지만 길고 긴 방학은 항상 "흔적없이" 지나가곤 한다. 오늘은 약 2주 동안 방학이었던 유빈이네 학교가 개학을 하는 날이다. 그간 아침 늦게까지 자느라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데, 오늘 아침 침대 옆의 알람은 5시 45분이 되어서 울기 시작했다. 한 2-3분 동안 침대에 앉아 괴롭게 고민하다가 일어나서 유빈이를 깨우고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나도 오늘은 사무실에 나올 생각이었기에 출근 준비를 하고 아내는 아침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6시 50분 정도에는 항상 문을 열고 나와 차를 탈 수 있도록 노력하는데, 오늘은 거의 제시간에 집을 나왔다. 출근 전에 유빈이 학교 가는 길을 구글맵(maps.google.com)으로 찾아 봤더니 평소 잘 이용하는 도로에 체증이 좀 있는 것으로 나온다. 경험상 구글맵의 교통 상황이 거의 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도 이 길로 가지 않고 다른 "대안"도로로 갔다. 다행 오랜만의 출근, 통학이었지만 이전과 다름이 없다. 


유빈이는 엊그제 나와 함께 머리를 깎았다. 제 의도와는 달리 짧아진 머리 때문에 어제부터 둥그런 모자 (beanie)를 푹 눌러쓰고 다니더니, 오늘 아침에도 그 채로 학교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차를 돌렸다. 유빈이 학교에서 내 사무실로 오는 길도 몇개의 다른 노선이 있는데, 오늘 구글맵이 제안한 길은 평소보다 교통량이 적었던 것 같다. 학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사무실로 왔을때가 8시도 되지 않았으니 평소보다 이르게 도착한 편이다. 




이런 저런 일을 처리하고 집에서 싸온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머리도 식힐 겸 한국의 TV 프로그램을 둘러 보는데, MBN에서 새로 시작했다는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 온다. 연예인 세명이 자기의 어머니와 지내는 모습을 보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인가 본데, 흥미로운 듯 보여 잠깐 영상을 재생해 봤다. 나이든 아들들이 그들의 어머니와 만드는 추억 내지는 과거 회상을 통해 현대의 부모와 자식, 특히 모자간의 관계가 어떤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는 프로그램으로 보였다. 


그러지 않아도 최근에 어머니로부터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맘이 좋지 않았는데, 저 프로그램을 보면서 어머니에 대해 평소보다 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2002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한창 젊을 때였고,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영국으로의 유학 준비가 원하는대로 잘 진행되어 엑시터 (Exeter)라는 도시에 도착해서 공부를 시작한지 3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평소에 같은 연세인 친구분들에 비해 젊게 보이셨고 건강하셨던 아버지를 갑작스럽게 떠나 보내드리는 것이 나와 형, 누나에게도 힘든 일이었는데,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재가 어머니에게 어떤 충격이었을지는 사실 짐작하기 조차 쉽지 않다. 


이후 어머니는 시골에서 아버지와 수십년 동안 운영하시던 문방구를 정리하시고 대전으로 오셨었다. 


당시 내가 대전에 살고 있었고, 이모와 외삼촌 등 몇몇 어머니의 형제들도 대전에서 살고 계셨으며, 형과 누나가 고등학교 대학을 대전으로 다니면서 자주 오가셨던 곳이었기 때문에 대전으로 새 삶터를 잡으 신것 같다. 내가 영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대전으로 다시 돌아 온 것이 2004년 여름이었는데 나의 가족도 이때부터 미국으로 오기 전인 2008년까지는 대전에서 다시 살았다. 


어머니와 내가 대전에 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같은 주택이나 아파트에서 산 것은 아니었다. 나는 복수동의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고, 어머니는 가장동의 아파트에 사셨다. (지금도 이곳에 살고 계신다.) 하지만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고, 어머니 홀로 계셨지만 내가 어머니에게 그리 효자는 아니었다. 바쁘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핑계일 것이고, 그 당시 차로 20여분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면서도 한달에 두세번 찾아 뵈었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어떤 때는 전화도 한동안 들이지 않아 정정하시던 당시의 어머니는 내게 격한 표현으로 서운한 감정을 숨기시지 않은 적도 많았다. 


그러다가 이곳으로 와서 살게 된지가 벌써 8년이 넘었다. 이 와중에 한국을 방문한 것은 지난 11월에 갔던 것까지 합해서 두번이었다. 그 사이 어머니가 이곳에 한번 오시기는 했었지만, 8년 동안 세번 밖에 만나지 않는 모자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도 연세가 드시고, 나도 이제 중년이라는 말에 적응이 되었을 정도의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인지 몇년 전부터 홀로 계신 어머니 생각이 자주 들고, 그렇게 가까이 살았을 때도 자주 드리지 않던 전화를 시차가 15시간이나 나는 이 머나먼 땅에 와서는 거의 매주 빠지지 않고 할 정도다. 


내가 갑자기 효자로 변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나도 자식을 키우면서 힘든 시절 나를 포함한 자식 셋을 키우셨던 부모님의 그 수고와 헌신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면서 생기는 감사 때문일 것이고, 가까이서 큰 명절에 찾아 뵙는 기본적인 예의를 하지 못함에 대한 죄책감일 것이다. 


그래봐야 "말로만, 입으로만 효도"할 뿐이다. 명절, 생신, 친척 애경사 등에 모시고 다니면서 일을 직접 챙겨드리는 것은 모두 누나와 형 그리고 매형과 형수가 하고 있고, 나는 그저 멀리서 전화 한두통일 뿐이다. 그래서 더 죄송하고, 누나와 형에게 더 미안하다. 


엊그제는 직접 전화를 하신 어머니의 목소리가 좋지 않게 들리기에 감기에 걸리셨나고 여쭸더니 친구분들과 대천으로 바람 쐬러 가셨다가 사고를 당하셨다고 한다. 사고 처리 과정에서 궁금하신 것이 있으셔서 전화하셨던 것인데, 얼마나 궁금하시고 걱정이 되셨으면 내게까지 전화를 하셨을까 생각하니 다시 한번 이곳에 나와 살고 있는 것이 죄송했다. 


같은 차의 앞좌석에 앉으셨던 분들은 꽤 크게 다치셨고, 어머니도 두통이 계속 있으시다고 말씀하시는 것 보니 꽤 큰 사고였던 것인가 본데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아마 누나나 형에게도 걱정이 될까 연락하시지 않으셨던 것 같고, 때마침 일이 있어 대전 집에 들른 누나가 병원과 한의원을 같이 모시고 다니고 있었다. 


몸이 불편하신 것도 불편하신 것이지만 그런 불편을 누구와 나눌 사람이 없이 혼자 감당하고 계시는 것이 몹시 죄송하다. 곁에서 병원으로 모시고 다니고, 의사를 같이 만나 상의를 하고, 같이 식사를 하고 말동무를 해 드리는 것이 자식된 도리고 최소한의 효도일 터인데, 이번 역시 나는 "입으로만 효도"일 뿐이다. 당시은 하는 일 없이 있는 사람이니 우리나 건강히 잘 지내라고 염려하시고, 사고 후에도 곧 나을 것이니 걱정 말라고 몇번이고 다독이는 어머니의 말씀이 더 죄송한 이유이다. 


누군가는 회초리로 매질을 하시는 어머니의 팔힘이 빠진 것을 느끼면서 울었다고 했다. 나는 어느 정도 큰 이후로 어머니의 회초리로 맞아 본 적이 없어 어릴 적과는 비교할 수 없게 되었지만, 자식이 전화하기 전에는 절대로 전화하지 않으시던 어머니가 가끔 먼저 전화하시는 것을 받을 때마다 어머니가 심정적으로 많이 약해지신 것이 아닌가 싶어 홀로 짠해질 때가 있다. 


어머니 말씀대로 이제 연세가 어느 정도 드셨으니 젊으셨을 때와 어찌 같을 수 있을까마는, 젊은 시절 그 혈기왕성하게 지역 활동도 하시고 자식에게 엄하게 대하시던 모습이 생생한 나에게는 아직도 어머니의 "순해지신" 모습이 어색하다. 가끔은 전화기를 귀에서 멀리 해야 할 정도로 쩌렁쩌렁 하던 어머니의 데시벨 높은 꾸짖으심이 그립다.  


<"국민학교" 5학년 혹은 6학년 때였을 것 같다. 학교 운동장 한켠에 저런 동물상 같은 것이 있던 과학동산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해 보니 이때 어머니의 연세가 나의 지금 나이보다도 적었던 40대 초반이셨다.>


<여기는 어딘지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번 한국에 갔을 때 앨범에 있던 사진들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몇장 찍어 온 것 중의 하나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모두 가족 여행을 갔던 것 같은데 나중에 어머니께 여쭤봐야 겠다. 이 사진 속의 아버지도 지금 나보다 젊으셨을 때이다.>



<아마도 내가 다섯살 정도 되었을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지만 이전에는 "창경원"이라 불리던 동물원. 

아마도 내가 고3때 친구들과 서울을 여행하기 전 마지막 서울여행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의 기억에는 이때 어머니와 함께 했던 이 여행에 대한 기억은 없다.>




이날 친하게 지내는 선배의 카톡을 받고 깜짝 놀랐다. 캔자스에서 역시 교수로 일하고 있는 선배인데, 어머니에 대한 책(e-book)을 써 냈다는 것이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선배에게 전화해 한참을 통화했는데, 대학 시절 당신의 어머니의 편지를 주제로 쓴 책이라고 한다. 


조만간 읽어 볼 예정인데, 비슷한 시기에 나와 선배가 같은 주제 혹은 같은 대상으로 고민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처음엔 무척 놀랐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나의 나이 또래가 늙어가시는 부모님 혹은 불행히도 빨리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이 그리워지고 또 그리워지는 때라서 그런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선배의 책 구입처: https://itunes.apple.com/us/book/eomeonileul-geulimyeo/id1193010395?mt=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