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통제해야 하리라
학기 수업 중에 다큐멘터리를 보여 주는 경우가 있다. 물론 강의의 흐름과 맞는 질 좋은 다큐멘터리는 나의 강의 부담을 덜어 주는 아주 중요한 (!)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토론을 이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기도 한다.
특히 경찰학 과목의 강의 초에는 Pruitt Igoe Myth 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데, 경찰이 다루는 문제 대부분은 경찰 자체에서 기인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에 좋은 자료이다. 특히 미국의 인종문제와 경제, 사회 정책 등 다양한 이슈가 포함되어 있어서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다큐다.
도서관에 DVD가 있어서 지금까지는 그것을 대출 받아 교실에서 틀었는데, 얼마 전 도서관 홈페이지를 검색하다가 도서관 웹사이트에 로그인하면 스트리밍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만 DVD와는 달리 웹사이트의 스트리밍 자료는 한시간 20분 정도 되는 것만 있었다 (DVD는 50분으로 재편집한 것이 있어서 수업 시간 활용에 아주 좋다).
어쨌든 멀지 않은 도서관에 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 교실 내의 스트리밍을 이용하기로 생각하고, 월요일 교실로 향했다. 학생들에게는 수업이 시작하자마자 바로 다큐를 재생할 것이니 평소보다 좀 더 일찍 오라는 얘기까지 해 놓고.
월요일 아침. 시작 시간보다 약 15분 정도 먼저 들어가서 노트북 컴퓨터를 설치하고 이것 저것 수업 자료를 챙겨 놓고 있는데 내 컴퓨터에 연결된 프로젝터가 작동이 잘 되지 않는다.
몇학기 전에도 사용한 교실이기는 했지만 이번 학기에 다시 이용하면서 미디어 장치 일부가 바뀐 후로 적응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는데, 그날따라 다시 작동이 되지 않는 것이다.
9시 반에 시작하는 수업인데, 9시 45분이 되어서야 간신히 교실 앞 면의 스크린으로 컴퓨터의 내용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컴퓨터가 화면만 켜졌지 파워포인트나 구글크롬 같은 프로그램을 실행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키보드 위쪽에 하드디스크 돌아 가는 작은 불빛만 분주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
사용하던 컴퓨터는 내가 처음 이 학교에서 일을 시작할 때 받은 노트북이니 2년 반 정도가 넘은 것이었다. 그간 내 업무용과 개인용으로 함께 사용해서 이번 학기가 지나면 교체해 달라고 할 생각이기는 했는데 그렇게 갑작스레 말을 듣지 않을 줄을 생각하지 못했다.
며칠 전에 사무실에서 확인했는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발생한 문제로 꽤 당황스러웠다. 다행 컴퓨터를 다시 시작한 후 화면과 컴퓨터 모두 작동되기는 했지만 불안 불안하더니 동영상이 중간 중간에 끊기듯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학생들에게는 기술적 문제로 다음 시간에 봐야겠다고 하고 평소보다 일찍 수업을 마친 후 사무실에서 다시 컴퓨터와 영상을 확인하려는데, 비슷한 증상이다. 컴퓨터를 부팅해서 처음 20분 정도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듯 싶은데, 그 후로는 제 멋대로다. 화일 하나 여는데도 몇 분이 걸리고, 사이즈가 큰 파워포인트 화일 같은 경우는 아예 열리지도 않는다.
학교의 IT 사무실에 가서 설명을 했더니 빌려갈 수 있는 노트북을 주면서 당분간 그것을 사용하고 있으면 상태를 보고 연락을 준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고, 충분히 수리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 IT 사무실 직원도 생각보다 상냥했고, 내가 보기에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닐 듯 싶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료만 다른 곳에 다운 받아서 새 컴퓨터를 사용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순진한 것이었다.
이 문제가 생긴 것이 얼마 전 수요일 (2/10)이었는데, 목요일 저녁이 될 때까지 연락이 없다. 금요일에 학과 회의가 있어 다시 IT 사무실에 들렀는데, 갈수록 좋지 않은 얘기만 전해 준다. 하드 드라이브가 생각보다 심하게 손상이 되어 복구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월요일까지는 어떻게든 소식을 전해 준다는 말을 붙이면서. 이때부터 상황을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장된 나의 모든 데이터를 모두 날릴 수 있다는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월요일.
항상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자"는 신조를 갖고 있기에 이번에도 아주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해 보기는 했지만 막상 직접 그 얘기를 들으니 멍... 했다. IT 직원은 너무 심각하게 하드 디스크가 파손되어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혹, 밖의 업체에 맡겨 1,000 불정도를 들이면 복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 직원들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착하게 보이려고 했고, 그들의 노력에 감사하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지만 사실 내 컴퓨터에 어떤 자료가 저장되었는지 파악이 덜 된 상태였다. 순간 떠오른 것은 그래도 지난 학기까지 만들었고 사용했던 모든 강의 자료는 백업을 해 놨으니 그래도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다는 스스로의 위안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컴퓨터를 이 사무실로 가져 올 때만 해도 데이터에 모두 접속할 수 있는 상태였는데, 그 손상이 나의 잘못 때문인지 아니면 이 직원들이 일하다가 모두 날려 버린 것인지를 따지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설령 그들의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엎어진 물을 어찌 할 수 없는 상태였다.
IT 사무실에서는 이 같은 상황에서 정해진 절차였는지 아주 능숙하게 새로운 컴퓨터를 꺼내 주고, 시스템에 접속해서 나의 몇몇 개인 정보를 넣게 한 후 이제 자기네가 할 일은 다 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20년 가까이 컴퓨터를 사용해 왔지만 이렇게 저장된 자료를 한꺼번에 몽땅 잃어 버린 경우는 지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어찌 생각하면 내가 항상 자료를 백업하고 컴퓨터를 소중히 다뤄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운이 좋아서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자료를 가끔 백업해 놓는다고 할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너무 소극적이 아니었나 싶다.
처음에는 잃어 버린 자료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루 하루 "아참, 그 자료도 저장되지 않았지..." 하는 일들이 계속 생긴다. 학과의 행정 관련 문서나 최근에 쓰기 시작한 논문들은 백업해 놓지 않았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지난 학기 말인 12월 초부터 이때까지 작업한 것들, 즉 약 2개월 반 정도의 작업은 저장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고 보면 (요즘의 많은 사람들처럼) 나의 삶은 이런 저런 전자 기계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물론 그렇게 의지함으로써 내가 편해 질 때가 많다. 내가 만약 지금 이 글을 종이에 펜으로 썼다면 벌써 "찍찍" 지워 없앤 문장이나 단어들이 수십개일 것이고, 바닥에 뒹구는 구겨진 종이들도 수십장이 될 것이다. 아니, 컴퓨터가 없는 상태라면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타자기로 썼다고 하더라도 실수할 때마다, 맘에 들지 않는 문장들이 나올 때마다 씩씩거리며 종이를 뽑아 없앳을 것이다. 내 앞에 있는 조그만 컴퓨터가 있으니 손가락을 조금씩만 움직여도 내가 생각하는 단어들이 눈 앞에 보이고, 문장이나 단락을 지우는 일도 쉽다. 이쪽에 있던 문장이나 단락을 앞쪽이나 뒤쪽에 옮기는 일도 쉽다.
이제 인터넷으로 무언가 (예를 들어 영화, 기차표, 책, 음식 등)를 예매하거나 구입하는 것은 일상의 일부가 되었고, 심지어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큰 컴퓨터를 쓸 필요도 없다. 손 안의 스마트 폰을 이용해서 이메일을 보낼 수 있고, 최신 뉴스를 확인할 수 있으며,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도 가능하다. 아니,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 별 의미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처럼 "문명의 이기"를 통해서 우리가 누리게 된 혜택은 이루 말할 수 없고, 나와 내 가족의 삶만을 보더라도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다. 굳이 이런 사실을 거론할 필요도 없는 정도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삶에서 10년, 5년전, 아니 불과 2-3년 전에 비해 어떤 혜택을 어떻게 누리고 있을까? 즉, 나는 이전에 비해 훨씬 더 행복하고 만족스러우며 값진 삶을 누리고 있을까? 수업을 준비하거나 글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때 편한게 자료를 찾고, 자료를 입력하며 결과물을 쉽게 확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나의 삶의 질은 그와 더불어 크게 바뀌어졌나?
나의 삶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만들어 주는 그 똑같은 도구와 장비를 통해 별 쓸모가 없는 뉴스나 영상 같은 데에 허비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컴퓨터가 늦어지거나 인터넷 접속이 조금이라도 안되거나 늦어지면 쓸모없이 화를 내고 감정 소비를 하는 일은 없는가? 컴퓨터나 인터넷에 이곳저곳 정보를 흩어 놓아 그것을 찾기 위해 허송하는 시간을 얼마나 많을까? 얼마 전 내 컴퓨터에 벌어졌던 것처럼 기계나 장비만을 신뢰하다가 일순간에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잃어 버리는 일이 또 생기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각종 기계와 장비, 도구들로 인해 이전의 작업 속도와는 비교할 수 없게 효율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벌어들인" 시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나의 여유로운 시간에 공원을 걷고, 책장에서 한번이라도 책을 더 꺼내며, 종이나 빈 화면에 글을 쓰고, 아이들과 함께 놀아 주는데 시간을 쓰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또 다른 재밌는 영상을 찾아 혼자 웃고 있지는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메일이나 휴대 전화기의 텍스트로 인사나 안부, 소식을 전하기 때문에 이제는 종이 위에 글을 쓰는 것은 물론 타자기를 이용하거나 프린터로 편지를 출력해서 보내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나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고 해서 나의 메시지가 쓸모 있거나 품격 있어지는 것은 아니니라. 내가 아무리 좋은 컴퓨터를 갖고 있고, 아무리 빠른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한다고 해서 그것을 이용해서 작업하는 내가 달라지거나 나의 결과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라.
다시 레코드판을 이용해서 음악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고, 일부러 산 속의 절이나 암자를 찾아 머리를 식히며, 전자기기와 떨어져 사는 것이 어떤지를 알려 주는 특별 프로그램 조차 있다는 것은, 빠르고 효율적인 기계와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잊고 사는 것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한참 쓰던 컴퓨터와 그 안의 내 많은 자료를 잃고 난 후, 귀중한 자료들을 별도의 공간의 수시로 저장해 놓지 않은 나의 미숙함을 탓함과 동시에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전자기기와 정보통신 장비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런 기계들을 사용하게 되면서 바뀐 나의 삶을 돌아 보게 되었다.
결국은 이런 자명한 결론이다.
나와 내 삶이 기계들을 다루고 통제해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지금부터 몇년간 같이 써야 할 컴퓨터다. 집의 나의 책상에서, 날이 좋을 때는 뒷뜰에서, 그리고 사무실에서 나의 일과 삶에 쓰여질 것이다.
내가 이것을 통제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 알아야 될 것이고, 언제, 얼마나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일부러 고민을 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