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빈이 사는 법

자식이 대견스러울 때

남궁Namgung 2015. 12. 17. 14:00


어제는 이런 생각을 해 봤다. 


부모님께서 나를 키우시면서 보람되거나 행복한 시간 보다는 마음 조이시고, 걱정하시고, 고민하셨을 때가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혹여나 단 몇번이라도 내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렸거나, 나를 자랑스러워 하셨을 때가 있으셨다면 그 때까 언제였을까... 


살아계실 때 아버지께는 물론, 아직까지 어머니께도 한번도 이에 대해 직접 여쭤 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내 스스로 생각해서 내가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키우시는 보람을 느끼셨을때가 있었다면 아마도 내가 중학교 2학년 (혹은 3학년때) 무슨 학력고사를 치렀을 때와 내가 재수하지 않고 경찰대학에 입학했을 때가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해 본다. 


나이 마흔이 넘어 아직도 학창시절의 성적을 거론하는 것이 부끄럽기는 하지만, 어렸을 적에 예체능이나 다른 어느 것에도 잘 하는 것이 없었던 내가 그나마 비교적 잘하는 것이 있었다면 학교에서 보는 시험 문제를 풀어 점수를 잘 내는 것이었다. 


면 소재지의 조그만 동네의 작은 학교에서 공부를 좀 했다는 것은 더 큰 학교나 도시에 있는 학교를 다녔던 또래들에게는 우스운 소리가 될 수도 있다. 그래도 그 조그만 우물 안에서는 선생님이나 친구들로부터 잘한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월등하게 잘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나의 친구 중에는 나보다 항상 잘하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초등학교 (당시 국민학교) 때부터 중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는데, 거의 그 친구가 학교에서 탑을 하고 나와 다른 친구들이 그 후순위를 번갈아 가면서 줄을 서곤 했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때 (지금 기억하기로는 도에서 주관하는)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이렇게 네 과목만을 시험 본 적이 있었다. (아마 당시에는 1년에 한두번 각 학년별도 군, 혹은 도에서 주관하여 각 학교의 학업 성취도를 비교하는 시험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전의 비슷한 많은 시험에서도 나보다 항상 잘하는 그 친구가 늘 1등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2학년때 치른 한 시험에서 전 과목 (그래봐야 국영수과 네과목) 모두 100점을 맞는 기염(?)을 토했던 적이 있다. ^^ 


나보다 항상 잘하던 그 친구가 네 과목에서 단 한문제를 틀렸었기에 그 친구가 다시 1등인줄 알았는데, 그 후 채점에서 내가 틀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알고는, 당시 그 조그만 시골에서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그 일이 며칠동안 화제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 부모님과 가까이 지내시는 선생님께서 부모님께 "선생님들 식사 대접으로 한턱 내셔야지 않느냐"는 권유를 하셔서 부모님이 동네 음식점에서 선생님들의 저녁을 사셨었던 것 같다. 지금 어머니가 이 일을 기억하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실수로 하나도 틀리지 않았던) 내가 스스로 자랑스러웠던 것 같다. 


그 후, 부여라는 작은 읍내 소재지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고, 경찰대학을 입학했다. 대학 학비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특히 아버지께서 내가 그 학교에 지원하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특히, 당시의 기준으로 졸업 후에 임용되는 경위라는 계급장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도 부모님께서 나의 학교 입학을 기뻐하셨던 이유로 짐작한다. 재학중에 대학과 고향 집 간의 거리가 멀어 자주 집에는 가지 못했지만, 가끔 주말이나 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면 말끔하게 제복을 입은 모습을 무척 흐뭇하게 보시곤 했었다. 


다른 어떤 경우가 있었는지는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지금 생각으로는 이 두가지의 성취라면 성취가 (내가 생각할 때) 나의 부모님이 나를 흐뭇하고 뿌듯하게 생각하셨을 때라고 짐작한다. 




어제는 유빈이 학교에서 오케스트라 콘서트가 있었다. 작년에 중학교에 입학 한 후 아내와 나는 유빈이에게 학교의 오케스트라와 밴드 중 오케스트라를 선택할 것을 권유했고 특히 세인트루이스에 살때 초등학교에서 잠시 배웠던 첼로를 계속 연주할 것을 권했다. 그래서 유빈이가 시작한 첼로 연주가 이제 2년 정도 되어 가는데, 악기 하나 정도는 계속 익히는 것이 좋을 듯 싶어 레슨을 시작한 지도 꽤 되었다.


어릴 적에는 말을 좀 듣는 것 같더니, 사춘기에 들어 서고 코 밑에 거뭇거뭇한 수염도 제법 나기 시작하면서는 집에서 아내와 나의 말에 항상 토를 달고 제 의견을 어떻게 해서든 피력하려는 것은 비단 유빈이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사춘기에 들어 선지도 꽤 되었고, 이달 말이면 만 13살이 되니 여기 말로 틴에이져 (teenager)다.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면 물론 이 같은 "격변의 시기(!)"를 거쳐야 할 것이라고 이성적으로는 항상 생각하지만, 이런 저런 일에서 어쩌다 아내나 나 (어떨 때는 우리 모두)에게 반항적으로 대할 때면 이성적 판단을 모두 잊고 나 또한 이해심 부족한 아버지로 돌변하는 경우가 꽤 있다.


첼로 이야기만 하더라도 이전에는 꼬박꼬박 알아서 연습하곤 하더니, 이제는 하루에 20-30분을 연습시키려면 많은 회유와 협박과 인내가 필요할 때도 적지 않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 제 친구들 사이에서 일어 나는 일에 대해서는 제가 기분이 좋아 먼저 이야기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가 물어서 답을 듣기도 쉽지 않다. 


어제 있었던 오케스트라 콘서트만 하더라도 제가 오디션을 봐서 어떤 연주를 한다는 것만 대충 말하고는 더 이상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아 정확한 사정을 알지 못하다가 어제 학교에 가서 프로그램을 받아 본 후에야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유빈이가 말한 오디션이라는 것은 오케스트라 팀 전체가 합주로 하는 연주 이외에 1명, 혹은 두서너명이 별도로 나와 연주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한 오디션이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연습을 더 했었야 하는데 그렇게 말해도 연습하지 않고 어떻게 하려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막상 나와서 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 흐뭇했다. 유빈이와 제 친구가 함께 시의적절한 (?) 곡을 연주 했는데, 방청객의 호응이 뜨거웠던 것은 첼로 실력이었다기 보다는 바로 연주한 곡의 타이밍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곳 시간으로 내일 (12/18, 금요일)이 스타워즈 영화가 정식으로 개봉하는 날인데, 이 영화를 기다리는 많은 학생들과 부모들이 연주 후에 큰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특히, 유빈이의 연주 바로 후에 선생님께서도 말했듯이, 스타워즈 테마 음악 뿐 아니라 팝송 (One Republic의 Secret)을 저희들이 직접 섞어서 연주했기에 더 호흥이 좋았던 것 같다. 물론, 나는 부모된 입장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 나와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뿌듯하게 보고 듣고 있었는데, 이전에 미적지근하던 반응 중에 갑자기 터진 환호성을 듣고 무척 대견하고 뿌듯한 마음은 숨길 수가 없었다. 


내 왼쪽에 앉아 있던 한 아주머니는 내가 카메라로 계속 촬영하는 것을 보고는 "네 아들이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아주 잘했다"며 내게 칭찬을 해주어서 더 뿌듯했다. 아내도 저희들이 아이디어를 짜 내어 곡을 붙여 연습하고, 그렇게 많은 청중 앞에 나서서 연주를 한 것이 반응도 아주 좋은 것을 보더니 기분 좋은 모습을 숨길 수 없어 한다. 


   


20년, 30년 후에 누군가가 유빈이를 키우면서 자랑스러웠을때, 대견했을 때가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혹은 아내와 대화를 하다가 애들이 어렸을 때를 회상할 때면 바로 어제 있었던 연주회를 꼭 되돌아 볼 것 같다. 




<이제는 제법 커서 옷도 내가 입는 것을 골라 입고 놀거나 학교에 갈때가 많다. 

어제는 흰 셔츠에 내가 매는 넥타이를 걸어 주었는데 그닥 많이 커 보이지는 않는다.>


<어떻게 보더라도 대다수가 백인 혹은 흑인인 이 사회에서 그래도 제법 제 노릇을 잘 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것 만으로도 흡족하고 대견스러운 일인데, 좀  더 잘하길 원하고 더 노력하기를 요구하는 나의 지금의 모습을 후에 이해해 줄런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