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현 사는 법

심심한 하루에의 감사

남궁Namgung 2015. 1. 7. 11:23


자동차 사고가 많지는 않았지만 가벼운 접촉 사고가 발생했거나, 경찰관의 과속 단속 등에 걸리게 되면 "아, 아까 그 신호에서 섰어야 하는데..." 혹은 "길이 막히더라도 원래 가던 길로 그냥 갔어야 하는데..." 하는 식의 후회를 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길을 걷다가 혹은 집에서 일을 하다가 발목을 삐긋하거나 다른 부위를 다치는 경우가 생겼을 때도 그 상황에 이를 때까지 행했던 많은 의사 결정 과정을 탓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 이전과 좀 달라진 "자세"가 있다면, 위처럼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 후회하는데 들이는 시간이 적어졌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이렇게 했었어야 하는데..." 혹은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지금은 이렇지 않을텐데..." 라는 식의 가정에 소모하는 에너지가 어릴 적에 비해 적어졌다. 


물론, 지금도전에 일어 났던 일이나 나의 의사 결정 혹은 선택에 대해서 위와 같은 상상, 가정, 후회 등으로 가슴 아파하거나 한숨 쉬는 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전에 비해 그런 후회에 사용되는 시간이 적은 것 같다. 무슨 일이 벌어졌으면 우선은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에 관심을 두려고 하고, 혹 내가 상황에 빠져있어서 제대로 판단을 못하고 한숨만 쉬고 있다면 아내나 다른 사람의 조언에 귀 기울이려 노력하고 있다. 


나는 이렇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확히 2주 전에 이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우리 동네의 쓰레기 수거는 매주 화요일이다. 가정마다 쓰레기 통에 일주일간 쌓인 휴지를 담아 보도(sidewalk)에 내어 놓으면 쓰레기 수거 차량이 점심 경에 동네를 돌아 다니며 그 쓰레기들을 담아 간다. 그리고 격주마다 재활용 쓰레기 (종이나 플라스틱, 유리병 등)도 수거해 간다. 일반 쓰레기 차량이 동네를 다녀간 후 1-2시간 후에 다른 차가 동네로 들어 오는데, 우리나라와는 달리 모든 재활용 쓰레기를 한꺼번에 담아 놓으면 별도의 재활용 쓰레기 차량이 동네를 돌면서 수거해 간다. 



<보통 일반 휴지통은 집 앞 왼쪽에 재활용품은 오른쪽에 내어 놓는다.


2주전 화요일 (즉, 2014년 12월 23일이다). 


방학 중이었고, 감기 기운이 있어서 늦잠을 자고 아침에 천천히 일어났다.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한 일 중의 하나는 집안의 휴지통을 모두 비워 쓰레기통을 집 앞 보도에 내어 놓은 것이었다. 아침에 급한 일만 챙겨 놓고 다시 침대로 돌아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뒷머리도 떴고, 옷도 대충 입은 채로 슬리퍼를 신고 천천히 차고에서 통을 끌어 내었다. 며칠째 추운 날씨가 계속 되고 있었던 전형적인 찬 겨울 날이었다. 


그리고, 이날은 재활용 쓰레기도 수거하는 날이기에 일반 쓰레기통보다 더 큰 재활용 휴지통을 역시 차고에서 꺼내 아래로 끌고 내려왔다. 그러다가... 


꽝!


바닥에 크게 엉덩방아를 찌면서 넘어졌다. 전날 비가 내렸고 밤 사이 기온이 내려가 얇게 얼은 상태였는데 그것을 제대로 못 보고 그대로 넘어진 것이었다. 넘어진 것 자체는 큰 충격이 아니었다. 당시에도 그랬고 나중에도 엉덩이나 발목, 무릎 등 다른 신체 부위에는 별 다른 이상이 없었다. 


그것보다는, 재활용 휴지통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잡고 내려 오던 상태에서 넘어졌기에 오른쪽 손가락 몇개가 휴지통 핸들에 깔리면서 손가락을 다쳤다. 



<저 손잡이를 잡고 내려가다가 넘어지면서 손잡이에 손가락들이 눌렸다.


너무 아파서 넘어졌다는 창피함 같은 것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주위를 둘러 보기는 했지만 다행(!) 그 당혹스런 광경을 직접 보고 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금새 중지와 약지의 손톱과 바닥쪽 손가락 가운데 부분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중지 손톱 사이에서는 약간 피가 흘러 나오기도 했지만 바로 휴지로 지혈한 후로는 더 이상 피가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 뼈가 부러지지 않았나 의심해야 할 정도로 통증과 붓기가 심했는데, 힘을 주어 움직여 보니 움직임에는 크게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렇게 사고(!)를 당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좀 더 있다가 쓰레기 통을 내어 놓을걸..." 혹은 "오늘은 감기 기운이 있어 몸이 좋지 않았으니 아내나 유빈이한테 내어 놓으라고 할껄..."과 같은 쓸데 없는 가정과 후회였다. 스스로는 이런 생각을 안하는 것에 잘 훈련이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었나 보다. 특히나 책을 잡으려다가 혹은 컴퓨터에 뭔가 작업을 하려다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는 손톱을 보고 있노라면, 그리고 어쩌다가 욱신욱신 불편할 정도의 통증이 올때면 "아...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와 같은 앞뒤 전혀 상관없는 자괴감이 들때도 간혹 있었다. 


직업 특수성상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거나 펜을 잡는 일이 많고, 그 일이 제일 많이 사용되는 신체 부위 중 하나가 오른손인데 그 중요한 두개의 손가락을 다쳐 지난 2주간 아주 불편하게 지냈다. 지금은 "사고" 직후나 지난 주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타자를 오래하면 중지, 약지의 손톱 끝에 약간 통증이 느껴질 정도다.  



<오늘 찍은 손가락 사진. 저 정도가 많이 호전된 상태다. 손톱에 멍 들은 것이 아래 혹은 위에서부터 빠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저분한 패턴으로 제대로 된 살색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부상을 당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서는 제대로 이성을 찾은 듯 하다. 


"그래도 뼈가 부러질 정도로 다치지 않았으니 그게 어디야." "그래도 허리가 다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방학 중에 다쳐 일하는데 큰 지장을 받지 않았으니 다행한 일이다."하는 식의 감사, 그리고 지금까지 손을 다쳐 하지 못한 일을 어떻게 보강해야 할까에 대한 대책 등에 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손가락 말고도 지금 몇 주째 감기로 고생을 하고 있다. 건강 체질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감기에 걸리는 일이 적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이곳 미국에 와서 걸리는 감기는 몹시 힘들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심했다. 그리고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 약 3주째 감기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1-2주 전에 두통과 몸살을 겸해서 끙끙 앓던 것에 비하면 지금 이렇게 타자라도 칠 수 있는 정신을 갖고 있는 상태는 많이 호전된 것이다. 


그래도 요즘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방학에 감기가 걸렸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학기 중에 걸렸으면 얼마다 더 고생했겠어." 


이젠 이렇게 앓다가 하지 못한 일을 신속히 보완하는 일이 남은 것이다. 그리고 사는 일에 더 신중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하루를 아무 일 없이, 아무런 사고나 이슈 없이 지냈다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무료했던 날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하루 종일 신중하고 조심했고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다치지 않고 사고 나지 않고, 속된 말로 "빵구"나지 않은 날이 된 것이다. 


심심한 하루, 심심한 일상을 불평하기 보다 심심한 하루, 심심한 일상을 위해 매 순간에 신중한 판단과 결정과 행동을 하고 있었음에 스스로 자부해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