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일 모른다"
얼마 전,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점검"하던 중에 두페이지 짜리 "강의계획서"를 발견했다.
내가 전혀 수강하거나 가르친 적이 없는 과목의 강의계획서이지만, 이 계획서가 무엇인지 한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강의계획서 옆에 써 있는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보니 이상하게도 반가운 느낌까지 들기도 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겠지만, 수년전만 해도 상관들의 학업을 아래 직원들이 대신 해주는 일이 적지 않았다. (심한 경우, 학위 논문을 써 주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전해 듣기만 했지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으니 그에 대해선 패스!)
당시에는 내가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싱싱한 유학파(?)" 였을 때였는데, 꽤 높은 상관께서 자신의 학업을 도왔으면 한다고 부탁을 하셨다. 그 분의 대학원 강의가 대부분 원어로 된 교과서나 논문 등이어서 진도에 맞게 해당 논문 등을 우리 말로 번역해 달라는 것이었다. 계획서만 보더라도 공부를 계속해 온 대학원생들도 쉽지 않게 생각했을 과목으로 보였다.
직장 생활 해 본 사람 다 알겠지만, 그 상황에서 "No!"라고 말하기 쉽지 않다. 다행이, 나는 당시 승진이나 다른 일에 신경쓸 일이 없었고, 무엇보다 나에게 원하는 일이 영어를 우리 글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막상 시작해 보니, 나의 예상과는 달리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일이었지만 중간에 포기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스스로 체면 걸듯이, "내가 이렇게 고생해서 저 분이 공부하게 되면, 우리 조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테니, 결과적으로 내가 하는 일이 조직을 위하는 일이다" 라는 아주 이상한 논리를 내 스스로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밤 늦게까지 논문을 번역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그분께 결과물을 들고 가면 따뜻하게 대해 주시고, 바쁘신데도 차 한잔 내 주시며, 어떤 때는 용돈도 찔러 주셨다. 상관이기 때문에 사적인 일을 시키면서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간혹 있다고 하던데, 그분한테서는 그런 모습이 없었고, 항상 미안해 하시는 모습을 보이시기도 했다. 나중에 다른 곳으로 전근 가신 후로도 나의 인사를 챙겨 주시려고 신경쓰시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고마운 마음까지 들게 되었다.
사실, 다른 능력은 별로 없는데, 조직 내에서 영어를 조금 한다는 이유로 이런 저런 동료나 상관들의 영어 공부를 대신 해 준 일이 적지 않았다. 양의 적고 많음이 차이가 있었을뿐이지 사실 오랫동안 영어에서 손을 내려 놓은 사람들이 영어로 된 긴글을 이해하려거나, 우리 글을 영어로 옮긴다는 것은 쉽지가 않은 일임을 내가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도 부탁을 받고서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은 착한(?) 내 성격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어떤때는 내가 이런 저런 사람의 영어 공부를 조금씩이라도 대신 해 준 것이 당시에는 짜증나기도 했었겠지만, 그래도 달리 생각해 보면 그 덕분에 이런 저런 분야의 원서를 꽤 읽게 되었고, 그래서 할수 없이라도 영어 공부를 계속 하지 않았겠나.
어떤 때는 책 한권을 통째로 번역해야 하는 일도 있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런 "인고의 세월(^^)"을 거쳤기 때문에 처음 이곳에서 대학원 과정을 시작할 때 충격이 그나마 덜하지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이전에 나에게 이런 저런 부탁을 했던 지인분들은 다 나에게 감사한 분들이다. 냉소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다. 그분들이야 나의 영어 실력을 유지 혹은 향상 시키기 위해서 부탁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분들을 통해서 내가 다양한 내용의 영어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한살 한살 먹어가다 보니 내가 살아 온 뒤로 돌아 봐도 얘기할꺼리들이 좀 생기는데, "세상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크게 공감하는 적이 많다. 그럴 때마다, 겸손하게 살아야 하고, 착하게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