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리
오늘 새벽에는 어찌나 바람이 세게 부는지, 처음에는 천둥번개를 동반해서 강한 비가 내리는 줄 알았다. 소피가 아니고서는 내가 잠결에 깨는 일이 그리 흔한 일이 아닌데, 밖이 무척 시끄러워 잠시 잠을 깨서 가만 소리를 들어 보았었다. 혹시 지금 살고 있는 지붕위로 그늘을 만들어 주느라 길게 뻗은 뒷마당 나뭇가지가 부러져 집을 덮치는 것은 아닌가 잠깐 걱정하다가, 졸려서 그냥 다시 잠들었다.
바람은 오늘도 계속 불어댔고, 뉴스를 보니 여기 중부 지방 중에서 피해를 본 곳이 많고, 단전되어 불편을 겪고 있는 집들이 많다는 소식도 들린다. 내일 아침이 낙엽이나 잔디 같은 야드 웨이스트 (yard waste)를 수거해 가는 날이기에, 학교에 다녀와서 지저분하게 떨어진 낙엽을 긁으러 나갔다가 바람이 꽤 세게 불어 옆부분만 잠시 긁다 말았다. 별로 표도 나지 않는데다가, 평소보다 힘이 더 들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대신 집 주위 여기 저기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통에 담아 길가에 내어 놓았다.
저녁을 준비하던 아내가 자기는 다른 반찬을 준비해야 하니 콩나물을 다듬으라는 "지시"를 하신다. 그냥 쪼그리고 앉아서 몇개만 다듬었더니, "철푸덕" 앉아서 하라는 추가 지시가 계셨다. 가만 하려고 보니, 이건 무슨 머리카락이 수북히 쌓인 것 같이 생겼다. 한 웅큼씩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 가닥, 두 가닥씩 들어서 가는 뿌리를 다듬어 놓는데,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비효율적인 작업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그래도 밖에서 움직이며 일 하고, 시원하게 씻고 있던터라 기분이 좋아서 그랬는지, 이것도 긍정적인 생각이 든다. (원래 잘 돕지 않는 사람이 이렇게 주방일 도와줬다고 "생색" 내는 법!)
언젠가 읽었던 책 중에서 집에서 해 먹는 Slow Food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과정의 긍정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예전 우리 세대에서는 당연했던 일, 즉 천천히 껍질을 벗기고, 뿌리를 다듬고, 물로 씻고, 칼로 자르고, 삶고, 비비는 등의 절차가 이제는 번거롭게 느껴질 정도로 모두 준비된 재료를 파는 경우도 많고, 전자렌지에 몇분만 돌리면 완성되는 간단한 음식들도 많아졌다. (우리집도 가까운 곳에 있는 중국 음식점에서 가끔 음식을 사다가 먹곤 하는데, 음식의 맛을 떠나 편리함만 생각한다면 정말 좋다!) 하지만, 음식은 그런 편리함만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어머니의 손맛이라고 했던 것은 어쩌면, 어머니의 "정성맛"이 아니었을까. 어머니가 음식을 만드실 때 사용하시는 어떤 "기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쏟아 부으셨던 그 정성들이 맛으로 나타나는 것이었을 것이다.
"철푸덕" 주방 바닥에 앉아 그 머리카락 같은 콩나물을 다듬으면서, 다음 달에 있을 학회에 갈 계획도 얘기하고, 이런 저런 소소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아! 이래서 slow food를 말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고보면, 어릴적 동네에서 무슨 잔치나 애경사가 있을 적마다 동네 아주머니들 (일명 부녀회원)이 모이셔서 큰 솥에 밥과 국을 끓이시며 큰 일을 하시는데도 즐겁게 하셨던 것은, slow food에 따르는 그 나름의 즐거운 대화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나 모른다.
어쨋든, 이렇게 저녁을 해서 먹었다. 아직도, 주방 오븐 위에서는 엊그제 사온 사골 국물이 큰 솥에서 펄펄 끓고, 그 구수한 냄새가 집에 가득하다. 이렇게, 그저 평범한 가족의, 그저 평범한 하루다.
사실, 지난 얼마 동안은 약간 심정적으로 "다운"되었었다. 슬럼프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하고, 그렇다고 뭐 특별한 이유도 없었지만, 괜히 학교의 일이며 공부에 흥미가 붙질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 손 논 것은 아니고, 그 와중에도 발표할 것, 과제 제출할 것은 다 했지만, 이전만큼의 기분이 들질 않았다. 원래 감정의 기복이 있는 편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이곳에 와서 이렇게 무기력했던 적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오늘 다시 특별한 이유도 없이 기분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아마도 속으로 계속 채찍질(이라고 하기에는 좀 과장같고...)을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직 해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고, 배워야 할 것도 많으며, 무엇보다 넘어야 할 산들이 있는데, 이렇게 주저주저 할 수 없다는 다짐들이 조금씩 생겨났다. 공부해야 하는 기간이 좀 길어지고, 앞으로 남은 기간도 그리 짧지 않아 아마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피곤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오늘 혜빈이네 프리스쿨에서 보내 온 가정통신문을 보니, 맨 마지막 장에 목사님이 쓴 글 중에도 나의 상황에 맞는 글이 실려 있다. 글 내용은 이곳 추수감사절을 기해 그간 피곤했던 것을 재충전하라는 취지였지만, 대개의 내용은 내게도 맞는 글이다. 아파트 안, 치킨집 광고지를 볼 때도 글쓴 사람을 생각해서 웬만하면 읽어 보려고 했었는데, 그런 나의 "좋은 습관(?)" 덕에 때 마침 내 상황에 맞는 글을 반갑게 만나게 된다.
A change of scene, a limiting access by people (even media) and a shift of focus can make all the difference when our batteries are low. Words of Jesus (in some of our Bibles printed in red). Simple, direct and clearly stated. Take the necessary steps. Now! "Come . . . apart into a desert place, and rest a while." Mark 6:31 KJV
뭐, 그간 여름방학에도 실컷 쉬고 했으니, 내가 어디 가서 더 쉬어야 할 정도로 피곤한 것은 아니지만, 가끔씩 자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 보고 숨을 고르고 가야하겠다는 생각을 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고 생각해 보니, 예전 출퇴근 길에 교보문고 앞에 큼지막하게 걸려 있어서 꽤 오랫동안 봤던 그 문구가 바로 지금 나를 위해 했던 말이었던가!
가는 데까지 가거라
가다 막히면 쉬거라
쉬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리*
(*방금 인터넷을 찾아 보니 김규동 시인의 "해는 기울고 - 당부" 중 일부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