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넘다
중학교 때 한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신 기억이 난다. 학생들에게 문제를 내면서 "다음 문장을 읽고 맞으면 X, 틀리면 O를 하시오"라는 지시문을 내면 열에 아홉은 그 반대로 표시를 해서 문제를 다 틀린다는 것이다. 즉, 의례 그런 문제는 맞을 경우 O를 표시하고, 틀릴 경우 X를 하는 것이 당연하겠거니 생각하고는 지시문을 읽지 않은 채 문제를 풀어 간다는 말씀이셨다. 지금 기억으로는 실제 그렇게 문제를 낸 적이 있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정말일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가끔 유빈이가 워크북 푸는 것을 도와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도 내가 항상 유빈이에게 강조하는 것이 워크북 페이지마다 맨 위에 나와 있는 directions을 항상 읽어 보라는 것이다. 그저 문제 유형을 보고 대충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지 푸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해가 되든 되지 않든 directions를 읽은 후에 모르면 나에게 물어 보라고 시키고 있다. 그 지시문을 읽지 않고도 대충 감으로 문제를 푸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고 잘못 이해하면서 그대로 문제를 푸는 경우도 몇번 봤기 때문에 항상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도 유전인지, 아니면 애들은 모두 그런지 모르겠지만, 돌이켜 보면 나도 어머니 한테 '서둔다', '건넘는다'는 말씀을 아주 자주 들었다. ('건넘다'는 말은 아무래도 사투리인듯 하다. 인터넷 사전으로 건넘다, 것넘다, 걷넘다, 겉넘다 등등을 모두 찾았는데 없는 말로 나온다. 내 어머니께서 사용하시는 '건넘다'는 '신중히 생각하지 않고 제멋대로 짐작하여 일을 행하다'라는 의미이다.)
나 뿐 아니라, 학창 시절 시험 문제를 풀면서 아주 쉬운 문제를 정말 '건넘어서' 틀리는 경험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돌다리도 두들기라는 오래된 말을 인용할 것도 없이, 매사를 신중히 생각하고, 판단해서 해 될 것은 전혀 없는데...
그런, 나의 '건넘음'을 어제 저녁 다시 한번 발견했다.
어제는 "교정학 (corrections)" 과목 시험이 있었는데, (다른 모든 과목이 그렇지만) 처음 수강하는데다가 이 교수님의 강의 기법이나 시험 출제 유형 등에 대한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다. 지난 학기 이 교수님한테 다른 과목을 수강한 학생들에게 약간의 정보를 얻기는 했지만, 그래도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강의 진도도 많이 나간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걱정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어제 시험 날이 되어 저녁 수업 시간에 문제지를 받았는데, 모두 다섯문제가 출제되었다. '헉! 한시간 동안 다섯문제를 모두 풀라고???' 속으로 '교수님 좀 독하네...'라고 생각하고, 내가 쓰는 답의 질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아는 범위에서 모두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시간 배분 잘 하고, 그럭 저럭 문제를 풀고 나왔다.
그런데, 나오면서 같이 박사과정 시작한 한 학생이 나한테 문제 중에서 어떤 것을 골라서 썼냐고 묻는다. "What???"
처음엔 그 친구도 내가 농담하는 줄 알았나 본데, 나는 다섯문제 다 풀었다고 하니까 크게 웃는다. 다섯 문제 중 세문제만 골라서 쓰는 것이었다는 '친절한' 설명 덧붙이면서...
집에 와서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보내 준 시험 문제 화일을 보니, 시험 문제의 가장 첫 문장이 바로 세문제를 선택하라는 지시문이었다. 이런 테러블한 미스테이크를...
유빈이한테 밤낮 directions 읽으라고 말하고, '건넘지 말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 말은 내 스스로에게 해야할 명령이다.
오늘 아침에 학교에 와서 교수님한테 간단히 사정 설명하고, 내가 제출한 것 중 1, 2, 4번만 채점해 주십사 부탁했지만, 그 교수님도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할까... 아마도 '건넘지 말라'는 주의를 주시겠지... 근데 영어로 '건넘지 말라'는 뭐여...
<이 문제지를 처음 봤을 때는 맨 위에 이름 쓰는 공란과, 문제의 번호 밖에 보이지 않더만...>
<집에 와서 다시 보니, 왜 저 첫 문장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지...>